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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의 꿈은 “태권도장을 여는 것”
- 미국 명문高 베버리힐스에 태권도동아리 창단

한국 힙합 1세대로 평가받고 있는 힙합가수 타이거 JK(36, 본명 서정권)가 최근 여러 매체를 통해 태권도 대한 애정을 과시하고 있다. 내가 좋아하는 것에 애정을 나타내 전에 없던 관심을 갖게 됐다. 사실 타이거JK가 태권도 이야기를 하기 전까지는 잘 알지도 관심을 갖지도 않았다.

얼마 전, 타이거 JK는 한 여고생과 트위터(@hye_in) 인터뷰를 통해 태권도에 관한 자신의 꿈을 이야기했다. 이 인터뷰 내용은 블로그 독설닷컴에서 소개했다. JK는 “태권도장을 하고 싶다. 지금 척수염 때문에 몸이 시멘트가 되었지만, 태권도장에 어려운 아이들과 함께 발차기하며 놀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타이거 JK가 태권도장을 개관한다? 혹자는 태권도를 할 줄 알고서 개관을 한다고 하는 거야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그는 태권도를 굉장히 좋아하고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여러 방송매체를 통해 확인한 바 있다.

2009년 7월 MBC 무한도전 <듀엣가요제>에 국민MC 유재석과 함께 팀을 이뤄 잠시 출연할 때다. 유재석과 녹음을 앞두고 이야기를 나누던 중 자신이 예전에 태권도 선수생활을 했던 사실을 밝혔다. 그러면서 간단한 발차기 시범을 보이고, 유재석에게 태권도를 가르치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 방송에 태권도에 대한 이야기는 아주 조금 밖에 나오지 않았다.

에 출연해 유재석에게 태권도를 지도하고 시범을 보이는 타이거JK. (사진=방송 캡처)'>
JK가 태권도에 대해 깊은 이야기를 털어 논 것은 올해 연초 MBC 황금어장의 <무릎팍 도사>에 출연해서다. 2주간에 걸쳐 방송된 분량에서 JK는 미국 유학시절 인종차별에 맞서기 위해 태권도를 수련한 이야기를 꺼냈다. 여기서부터 본격적으로 태권도에 관한 다양한 자신의 추억을 소개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간 JK는 아버지의 권유로 작은아버지가 있는 마이애미를 혼자 떠난다. 당시 작은아버지는 태권도장을 운영할 때다. 소수민족인 이방인으로 살아가는데 있어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태권도를 수련했다.

꾸준한 실력을 쌓아 1990년도에 플로리다주 태권도대회에서 청소년부에서 우승을 차지해 이후 주 대표까지 경험하게 됐다. 그러면서 관련 사진자료도 소개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영어 의사소통이 잘되면서 실력도 많이 늘었다고 했다.

방송에서 태권도 이야기 중에 가장 관심을 쏠리게 한 부분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청소년기에 접어들 무렵 LA로 이사를 하게 된 JK는 세계적인 명문고 베벌리힐스 고등학교(Beverly Hills High School)에 입학하게 된다. 이 학교는 안젤리나 졸리를 비롯해 수많은 연예인은 물론 부호들의 자녀들이 다니는 명문고이다.

어렵게 이 학교에 입학한 JK는 자신이 좋아하는 태권도를 여러 학생과 공유하기 위해 교내 태권도동아리를 만들었다. 이를 위해 교장에게 찾아가 “태권도 클럽을 만들면 학생들의 심신을 단련할 수 있고, 하나의 스포츠로 인기를 얻을 수 있어 학교 이미지도 많이 좋아질 것”이라고 창단을 할 수 있도록 설득했다. 이렇게 교장의 승인을 받아 정식으로 태권도동아리가 생기게 됐다.

베러리힐스 고등학교는 미식축구, 배고, 골프, 수구, 축구 등 13개 종목의 엘리트 스포츠단을 운영할 정도로 스포츠에 관심이 높은 학교로 알려져 있다. 이 학교에 JK는 엘리트 태권도선수단은 아니지만 우리나라 대표 브랜드 태권도동아리를 만들었다. 이를 계기로 그는 여러 학생들 사이에서 인기가 좋은 학생으로 발돋움하기까지 했다. 동양인이라고 무시도 안 당했다.

미국에서 그가 경험한 태권도에 대한 일화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LA에서 열린 한 랩페스티벌에 초청되어 그 곳에서 태권도를 가미한 랩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앞서 인종차별로 LA 한인타운 흑인폭동 사건이 있었고, 또 유명 래퍼인 아이스큐브가 ‘Black Korea’라는 노래로 한국인을 비하하는 발언이 있은 지 얼마 되지 않을 때, 당당히 한국인과 태권도의 강한 의지의 메시지를 담은 랩을 선보여 큰 환호를 받았다.

오늘 소개한 타이거JK는 한 때 희귀병인 척수염을 앓았다. 현재도 완치가 되지 않아 계속 치료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척수염은 신경다발에 염증이 생겨 마비까지 일으키는 희귀병이다. 이런 힘든 가운데에서도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과 태권도를 힘으로 당당하게 활동하는 멋진 이 사람을 언젠가 꼭 한 번 직접 만나보고 싶다.

그리고 그의 꿈인 ‘태권도장’을 반드시 개관해 여러 수련생에게 자신처럼 꿈과 열정, 그리고 희망을 전해주길 진정으로 바란다. (끝)

드렁큰 타이거 (서정권) / 국내가수
출생 1974년 6월 11일
신체 키180cm, 체중65kg
팬카페 CBMass와 DrunkenTig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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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ㅋㅋㅋ  수정/삭제  댓글쓰기

    2년?? 정도 전까지만해도 JK노래가 어둡다고 생각했는데..

    방송에 얼굴비추면서 조금씩들어보니까

    어둡다는 편견이 사라짐..ㅋ

    2010/02/21 0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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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권도가 좋아 한국을 찾은 이방인의 첫 결실

태권도 종주국에 태권도를 배우기 위해 한국을 찾는 외국인이 많다. 선수출신으로 아예 조기 유학을 오는 외국인이 있는가 하면, 태권도학을 수학하기 위해 찾는 이도 있다. 뿐만 아니라 종주국 태권도를 체험하고 한 수 배우기 위해 관광차 방문하기도 한다.

오늘 우연히 포털에서 한 뉴스가 내 눈에 들어왔다. 한 외국인이 태권도학 전공과정을 마쳤다는 소식이다. 화제가 된 이 학생은 이탈리아 출신의 마르코 이엔나(27)이다. 태권도 공인 4단으로 얼마 전 경희대학교 태권도학과 학사과정을 우수한 점수(4.0)로 졸업했다. 게다가 한국어학을 복수전공해 ‘한국어 교사 자격증’까지 따내 주위를 더욱 놀라게 했다.

태권도가 좋아 종주국을 찾아 태권도 명문대학 태권도학과에 입학해 전공 정규과정과 한국어학을 마치고 학사학위를 받은 마르코 이에나.

마르코가 졸업한 경희대는 학과 개설 이해 외국인 졸업생 배출은 처음이다. 처음에는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입학을 거절했지만, 입학을 위해 한국말을 배우고 태권도를 배우고자하는 열정이 대단해 결국 입학을 허가했다.

남들보다 힘들게 입학한 만큼 학업에 더 열중했다. 그의 열정은 학과 교수들과 동료 학생들을 감동시켰다. 그토록 어렵게 들어간 학교지만, 이제는 어엿한 학교 ‘홍보대사’로 임명돼 활동 중이기까지 한다.

태권도가 좋아 한국을 찾아 대학까지 졸업한 마르코는 이게 끝이 아니라 석사, 박사과정까지 계속 한국에서 밟을 예정이라고 한다. 연합뉴스와 인터뷰를 통해 그는 “태권도에 인생 전부를 걸었다. 9월 대학원에 들어가 석사과정을 밟고 이어 박사학위도 딸 계획”이라고 밝혔다.

그가 이렇게 태권도를 좋아하고 계속 공부를 하려고 하는 이유는 뭘까. 이와 관련 연합뉴스 인터뷰에 “5년 뒤 박사학위를 받으면 이탈리아로 돌아가 태권도 연구와 보급에 앞장 설 것이다. 보고 느끼고 경험한 한국의 모든 것을 알리는 일도 앞장서겠다”고 구체적인 계획을 밝혔다.

마르코와 함께 동문수학한 동료 말에 따르면, 그는 성실한 노력형 학생이었다. 부족한 게 있으면 그것을 채우기 위해 노력했기 때문이다. 그의 동기는 “지금은 한국말을 유창하게 잘하지만, 처음에는 서툴러 한국어학과를 복수전공 했다. 부족한 태권도 실력을 쌓기 위해 힘든 선수부에 들어가 함께 훈련했다. 2007년에는 태권도학과 학생회에서 홍보담당으로 활동을 열심히 했다”면서 “나중에 박사학위를 마치고 이탈리아로 돌아가면 태권도학과를 만드는 게 꿈이라고 늘 말했다”고 마르코를 소개했다.

마르코는 이탈리아 로마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무술에 관심이 있어 가라테와 유도를 배웠다. 7세 때 아버지를 따라 태권도장에 처음 가게 됐고, 이탈리아인 사범에게 태권도를 처음 배웠다. 아들을 위해 태권도장에 간 아버지 역시 태권도를 배워 부자가 모두 공인 4단이다. 청소년기에는 이탈리아 태권도 대부 박영길, 박선재 사범에게 체계적으로 태권도를 수련했다.


그는 태권도를 “태권도 안에 들어 있는 정신과 예의는 사람을 사람답게 살도록 가르치고 있다. 태권도를 배우면 배울수록 이러한 매력에 깊이 빠져든다”고 태권도에 빠지게 된 사연도 소개했다.

* PS. 이 포스팅은 일부 연합뉴스가 2월 15일 보도한 기사 원문을 참조 및 인용해 작성한 것을 알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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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영애, 세계품새선수권대회 4연패 대기록 달성 뒷이야기

세계품새선수권대회 4연패 대기록을 달성한 서영애 선수(48, 전주비전대학)

지난 2일 이집트 카이로에서 제4회 세계태권도품새선수권대회가 막을 내렸습니다. 제가 활동하고 있는 이집트에서 열린 대회라 대회 기간 전후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움직였습니다. 개인적으로 대회를 관전하고 싶었지만, 맡은 일이 대회장 밖에 주로 있어 몇 경기 보지 못해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하지만 관심을 가졌던 경기는 볼 수 있었습니다. 바로 장년 1부(41세-50세)에 한국 대표로 출전한 서영애 선수(전주비전대학, 48세)의 경기입니다. 다른 한국 선수들에 비해 특별한 도전을 했기 때문입니다. 바로 세계품새선수권대회 4연패 대기록 달성 여부를 눈으로 직접 확인하기 위해서 옅습니다.

한국 대표팀은 물론 세계 각국에서 서영애 선수는 대회 시작 전부터 관심의 대상이었습니다. 대회 출전자 중 유일하게 2006년 1회 대회부터 4년 연속 연패에 도전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난 달 26일 밤(현지시간) 결전지 이집트에 도착한 서영애 선수는 몸 상태가 좋지 못하였습니다.

29일 저녁 호텔 로비에서 만난 서영애 선수는 사흘간 몸 상태 때문에 혼자서 속을 태워야 했던 뒷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열이 많이 나서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할 정도로 상황이 심각했다더군요. 그래서 대회장 적응훈련도 제대로 못했다고 합니다. 문제는 여러 증세가 신종플루와 비슷했다는 것입니다. 

속으로 끙끙 앓던 서영애 선수는 마지못해 대표팀 고봉수 전무이사(전주비전대학 교수)에게 “지금 몸이 너무 안 좋다. 혹시 신종플루가 아닌지 모르겠다. 아직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혹여 신종플루라 하더라도 꼭 경기에 출전하고 싶다. 그러니 고 전무만 알고 있어라. 대회가 끝나기 전까지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아 달라”라고 간곡하게 부탁했다고 합니다. 이에 고 전무는 개인적으로 준비해온 타민플루가 있으니, 몸 상태를 하루 정도 더 지켜보자고 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두 사람만의 비밀은 이틀 만에 끝이 났습니다. 다행이 몸 상태가 대회 개막 하루를 앞두고 호전되었기 때문이다. 대회 4연패 달성이라는 큰 기록에 대한 부담감과 한국과 현지의 기온차로 인한 단순한 감기 몸살이었던 것이었습니다. 최상의 컨디션은 아니지만 목표 달성까지 며칠간의 여유가 있으니 큰 걱정이 없다며 자신감을 내보이기까지 했습니다.

결전의 날인 2일. 바쁜 와중에 경기장을 찾았습니다. 때마침 서영애 선수가 본선 마지막 경기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다른 일이 멈추고 경기를 지켜봤습니다. 그날 몸 상태가 얼마큼 좋아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제 눈에는 완벽하고 흔들림 없는 경기를 펼쳤습니다.

전광판에 점수가 나오지도 않았는데 한국 선수단은 물론 서영애 선수 자신도 우승을 확신한 표정들이었습니다. 결과 역시 예상대로 ‘금메달’이었습니다. 대회 첫 회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우승을 놓치지 않고 4연패라는 대기록을 달성한 것입니다. 

이집트 및 중동 스포츠 전문채널에서도 서영애 선수의 대회 4연패 소식을 비중있게 보도했다.


이번 대회에 가장 크게 빛난 서영애 선수는 대학을 졸업한 자녀를 둔 ‘아줌마’입니다. 딸 김수향 선수(23)는 국가대표 출신의 실력 있는 선수로 현재 고양시청에서 선수생활 중입니다. 모전자전인 셈입니다.

서영애 선수는 “스티븐 로페즈가 지금 세계선수권 5연패로 기네스 기록을 가지고 있잖아요. 축하해줄 일이지만 이왕이면 종주국 선수가 그 기록을 가졌으면 해요. 최연호 선수가 얼마 전에 4회 우승을 했는데, 몸조리를 잘해서 그 기록을 깨줬으면 해요. 저도 겨루기 분야는 아니지만, 같은 세계선수권대회인 품새대회를 통해 5연패, 6연패를 달성해 종주국의 위상을 회복하고 싶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서 선수의 꿈은 앞으로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 연패 기록을 갱신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큰 욕심을 부린다고 할 사람도 있겠지만, 그녀의 말에서 애국심과 종주국의 자부심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세계대회보다 더 경쟁이 치열한 국내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태극마크를 따내야 합니다. 이번에 보여준 백절불굴(百折不屈)의 태권도 정신이라면 앞으로 계속 새로운 기록을 달성하지 않을까요.

한편, 겨루기와 달리 품새 부문은 아직까지 종주국 선수단의 독무대라 할 정도로 실력이 월등히 앞서고 있습니다. 이번 대회에서도 한국선수단은 총 9명이 출전에 금메달 8개, 은메달 1개로 대회 4연패를 달성했습니다.  결과 면에서 한국 선수단이 전 부분을 휩쓸다시피 했지만, 타 국가 선수들의 실력 또한 전에 비해 많이 향상되었다고 전문가들은 평가했습니다. 품새 대회가 겨루기대회처럼 권위와 명성을 얻기 위해서는 타 국가 선수들의 실력 향상과 함께 기량 평준화가 하루 빨리 이뤄져야 한다는 숙제가 남았습니다. (끝)

[이집트 중동의 유력 스포츠 전문 채널에서 서영애 선수의 4연패 소식과 경기를 비중있게 보도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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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픽-세계선수권-월드투어 2009 메이저 대회 모두 휩쓸어
세계랭킹 1위(최고점 기록), 태권도 그랜드슬램 대기록 달성

10월 18일 덴마크 코펜하겐 발러럽 슈퍼 아리나 경기장에서 열린 2009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 여자 62kg급 시상식에서 오른손을 들어 환호에 답하고 있는 임수정. [사진제공=세계태권도연맹]

종주국 간판스타 임수정(수원시청, 23)이 이제 세계적인 스타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올림픽, 세계선수권, 월드투어 등 태권도 메이저 대회를 잇달아 휩쓸며 여자부 최강자로 맹위를 떨치고 있다.

세계태권도연맹(WTF)이 발표한 11월 세계랭킹에서는 170점으로 남녀 16체급 중 가장 높은 점수를 기록했다. 또한 얼마 전에는 세계선수권대회 우승으로 그랜드슬램(아시아선수권-아시안게임-올림픽)이라는 대기록까지 달성했다. 국내 태권도에서는 문대성, 황경선에 이어 세 번째 그랜드슬래머이다. 이만하면 종주국뿐만 아니라 세계 태권도의 간판선수라 해도 손색이 없다.

임수정은 지난 14일 멕시코시티에서 열린 ‘월드태권도투어 2009, 멕시코대회’ 여자 -57kg급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준결승에서 태권도 명가(名家) ‘로페즈 가문’에 막내 다이애나 로페즈(미국)를 꺾고 결승에 올랐다. 결승에서는 에우다 까리아스 모랄레스(과테말라)를 15대 2로 가볍게 제압했다. 대회 우승으로 상금 2만 달러(약 2천3백만원)를 챙겼다.

임수정의 특기는 파이팅 넘치는 자신감이다. 스스로를 믿는다. 경기 시작 힘차게 외치는 기압은 상대의 기선을 제압한다. 빠른 발놀림으로 상대의 허점을 파고든다. 빈틈을 노리고 들어오는 선수에게는 주특기 뒤차기로 응수한다. 수비형 선수에게는 속임 동작으로 중심을 흔들어 파고든다. 이 결과 국제대회에서 불리한 신제조건을 극복한다.

2001년 국가대표선발전에서 중학교 3학년 신분으로 최연소 태극마크를 달았다. 이듬해 부산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따내며 장래가 기대되는 선수로 주목받기 시작한다. 이후 세계주니어선수권대회 등 각종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승승장구했다. 하지만 대학진학 후 이렇다 할 성적을 거두지 못하면서 슬럼프가 시작됐다. 반면 그의 스파링 파트너였던 황경선은 무패신화를 이어가며 종주국 간판스타로 활약했다.

정상에 너무 일찍 오른 탓일까. 슬럼프는 길었다. 과도한 정신적 스트레스로 신경정신과 치료까지 받았다. 운동을 그만둘까도 심각하게 고민했다고 뒤늦게 밝히기도 했다. 노력하는 자에게는 그만한 보상이 따르는 법. 동료 선수들이 활약하는 순간, 포기하지 않고 이를 악물며 훈련했다.

[사진 - 한국의 임수정 선수(오른쪽)가 10월 18일 덴마크 코펜하겐 발러럽 슈퍼 아리나(Ballerup Super Arena) 경기장에서 열린 2009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 여자 62kg급 이하 결승전 경기에서 중국의 후아 장(Hua Zhang) 선수에게 발 공격을 하고 있다. 사진제공 = 세계태권도연맹]

재기의 불씨는 2006년 켜졌다. 국가대표 선발은 좌절됐으나, 대신 세계대학선수권대회 출전 자격을 얻는데 성공했다. 다시 찾아온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대회에 출전해 우승을 차지했다. 이어 2007 유니버시아드대회까지 우승하면서 자신감을 되찾았다. 그 결과 꿈에 그렸던 올림픽 출전 티켓을 따냈다. 이후 지금까지 출전한 메이저 국제대회를 모두 휩쓸며 ‘무패 신화’를 이어가고 있다. 위풍당당 세계 최고의 선수로 명성을 떨치고 있다.

쉽게 포기하지 않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임수정 선수에게 격려의 박수를 보낸다. 더불어 앞으로도 부상 없이 좋은 활약을 기대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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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베이징 세계선수권대회 우승 직후 세 손가락으로 자신의 3회 우승을 알렸다.

‘날쌘돌이’ 최연호가 우승을 확정 짓는 순간 네 손가락을 치켜세웠다. 그 의미는 무엇일까. 세계선수권 4번째 우승을 했다는 일종의 세리모니인 셈이다. 2년 전 베이징 세계선수권대회 우승 때에는 세 손가락을 세운 바 있다. 종주국 대표팀이 초반 부진한 성적으로 술렁이는 가운데 분위기를 반전할 만한 귀중한 우승을 차지했다.

최연호(29, 한국가스공사)는 18일 오전(한국시간)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열린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 남자 핀급(-54kg)급 결승에서 아프가니스탄 마흐무드를 상대로 연장 접전을 펼친 끝에 우승을 차지했다. 2001 한국(제주), 2003 독일(가뮈시), 2007 중국(베이징) 선수권에 이어 개인통산 4회째 우승이다. 태권도 경량급에서 4회 우승을 차지한 것은 최연호가 처음이다.

세계선수권 사상 4회 이상 우승을 차지 것은 최연호를 포함해 모두 3명뿐이다. 이제는 전설이 되어가는 정국현 교수(한국체대)와 이번 대회 우승으로 5연패의 위업을 달성한 미국의 스티븐 로페즈 뿐이다.

최연호가 세계선수권 4회 우승을 차지 할 수 있었던 원동력을 무엇일까. 첫째 풍부한 국내외 경기를 통한 노련한 경기운영, 둘째 철저한 자기관리, 셋째 빠른 발차기, 넷째 순간적인 판단력 등이다.

최연호는 각종 국내외 대회 출전 경험이 많다. 다양한 선수들과 경기를 치러봤다. 상대에 대한 탐색은 1회전만 가지면 충분하다. 위기에서 자신에게 유리한 경기 운영을 할 수 있는 노련미를 가졌다. 풍부한 경험이 그를 더욱 성장시킨 것이다.

고등학교 졸업 이후 최연호는 평균 8kg 이상 체중을 감량했다. 운동선수가 기운을 내기 위해서는 뭐든 먹어야 한다. 그러나 물 한 모금조차 목구멍을 넘기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체력 관리와 컨디션 조절은 기본이다. 중량급에 비해 경량급은 체력소비와 발차기 빈도수가 높다. 그런 면에서 최연호는 강한 체력을 유지하고, 빠른 발차기를 주특기로 가진 선수다. 즉, 자기관리가 되지 않는다면 이미 오래전에 운동을 그만 뒀을 것이다.

내년이면 서른을 앞둔 최연호. 중량급에 비해 빠른 발차기는 필수다. 녹슬지 않은 빠른 발차기 덕에 그가 10여 년 동안 세계 정상을 지킬 수 있었다. 장담컨대 전현직 태권도 선수 중 발차기 속도로는 최연호가 가장 빠르다. 눈 깜짝할 사이에 2회 이상 발차기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앞발 빠른 발은 그의 전매특허다. 그래서 나는 최연호에게 ‘날쌘돌이’라는 수식어를 달아줬다.

최연호는 몸에 나쁘다는 것은 별로 하지 않는다. 자기 관리를 위해서다. 취미는 온라인 게임이다. 쉬는 날에는 날이 새도록 게임에 빠진다. 대전게임에 능하다. 그 게임들은 전략과 전술, 그리고 위기에서 순간적인 판단력이 요구된다. 온라인 공간에 태권도가 아닌 게임을 통해서는 그는 두뇌 트레이닝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것을 염두하고 한 게임을 절대 아니겠지만 말이다.(^^) 결과적으로 취미생활이 독은 아니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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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dddf굿잡

    2009/10/18 2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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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권도 人]  정부 파견 사범 임기종료 후에도 봉사단원으로 활동 계속

 

이집트 국립 경찰대학교에 태권도를 정규과목을 채택했다.


인류 문명의 발상지 이집트에 태권도를 23년간 보급한 한인 태권도 사범이 있다. 태권도 지도뿐만 아니라 한국과 이집트 양국간 우호관계를 맺는데 큰 역할을 했다. 인지도가 낮은 한국의 이미지를 격상하는데도 큰 몫을 하기까지 했다. 그 주인공은 임한수 사범(52)이다.
 

우리나라 외교통상부 산하 코이카를 통해 정부파견 태권도사범으로 지난 1986년부터 이집트에 태권도를 보급한 임한수 사범이 24년째 활동을 멈추지 않고 있다. 한반도 다섯 배가 넘는 이집트 곳곳에 태권도가 보급되려면 아직 멀었다는 이유에서다. 그래서 아직도 매주 지방 곳곳을 돌며 지도자 보수교육 및 신규 보급에 열성이다. 현지 태권도인들에게도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다
 

임한수 사범은 1986년 당시 외무부(현 외교통상부)를 통해 이집트에 태권도사범으로 파견됐다. 1991년부터는 코이카(한국국제협력단, KOICA) 소속으로 전환돼 활동을 계속했다. 그렇게 22년을 활동하다 2007년 연령제한으로 정년 퇴직했다.

 

신체 어느 곳 하나 아픈 곳이 없고, 직접 시범을 보이면서 지도하는데 어려움이 없는데 규정상 어쩔 수 없이 정년퇴직을 하게 된 것이다. 한국으로 돌아갈까도 셀 수 없이 생각을 반복했다. 그러나 그는 이집트를 떠나지 않았다. 22년간 정신 없이 활동했음에도 이집트 내에 태권도 보급이 다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한국으로 돌아와 코이카 해외봉사단 시니어단원으로 다시 이집트로 떠났다.

순수하게 봉사를 위해서다. 태권도를 통한 봉사활동을 하면서 그의 제2의 인생이 시작된 것이다.

 

이집트 최남단도시 아스완에 방문하여 지도자교육을 하고 있는 임한수 사범.

그는 좋고 편한 업무를 뒤로하고 자청해 일선 클럽 수련생 지도와 지역별 순회 지도자교육을 매주실시하고 있다. 클럽 지도는 그가 양성한 현지 지도자들이 충분히 가능하다. 하지만 처음 시작하는 수련생들에게 태권도의 정신을 심어주기 위해서 쉬지 않는다.

 

임한수 사범은 “지방에 가면 도복도 없이 수련하는 수련생이 많다”며 “그때마다 내가 입

고 갔던 도복이며, 신발(태권도화)을 벗어주고 온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고 말한다.

 

임한수 사범은 1986년부터 1995년까지 이집트 성인 및 청소년 남녀 국가대표팀을 이끌었다. 부임 첫 해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열린 1회 세계대학선수권대회에서 금메달 1개와 은메달 1개를 획득하면서 종합 3위를 달성했다.

 

아랍권과 아프리카 선수권대회에서는 전 체급을 휩쓸 정도의 최강실력을 과시했다. 88 서울 올림픽(시범종목)’에서 은 1(종합5), 92 바르셀로나올림픽(시범종목)’에 동 2(12)를 각각 획득한 바 있다.

 

대표팀 양성에 바쁜 와중에도 그는 주재국 태권도 근간이 되는 클럽순회 지도를 빼놓지 않고 열심히 지도했다. 또한 태권도 승급심사 및 승단심사와 각종 개최되는 시합을 관리감독 했다. 이집트 태권도의 '정신적인 지주'인 셈이다.

 

그는 95년 대표팀 감독 직을 그만두고 국립경찰대학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 때 전 학년의 필수과목으로 태권도를 채택하는 큰 성과를 거뒀다. 이렇게 2002년까지 7년 동안 경찰대생과 경찰간부 등 13천여 명에게 태권도를 지도했다. 그에게 태권도를 배운 학생들은 졸업 후 각 지역 경찰서 등에 간부로 부임해 태권도 보급 활성화를 도모했다. 이를 계기로 이집트 군경에서는 승단이 목적이 아닌, 호신 무술로 태권도를 의무적으로 수련하고 있다.  

 

그는 단순히 태권도 지도만 하지 않았다. 수련생들과 학부모 등에게 한국의 차량 및 전자제품, 의류 등 각종 제품에 대하여 높이 평가하는 간접적인 홍보활동을 지속적으로 했다. 이를 통해 우리나라 기업들의 교역 및 투자와 자원시장이 활성화되는데 작은 힘을 보탰다. 이런 작은 활동으로 그가 첫 이집트에 파견된 당시와 비교해 지금은 주재국내에서 한국에 대한 인지도와 이미지는 크게 달라졌다.

 

그의 활동은 아직 멈추지 않고 있다. 몸이 움직일 수 있을 때까지 현장에서 지도를 하겠다는 것이다. 그는 “이집트 중부와 남부지방에는 아직도 태권도 보급이 안 된 곳이 많다”며 “이집트 지방곳곳까지 태권도가 보급될 수 있도록 여력을 다할 것이다”고 앞으로의 계획을 말했다.

2009/05/15 - [한혜진의 태권도 세상] - 인류 문명의 발상지 이집트 in 태권도 보급과 현황 - 1
2009/05/17 - [한혜진의 태권도 세상] - 인류 문명의 발상지 이집트 in 태권도 보급과 현황 - 2
 

 

이집트 아스완 지도자교육을 마치고 현지 지도자들과 기념촬영을 한 임한수 사범.

지도자교육을 마치고 필자와 함께


[by 한혜진의 태권도 세상 이야기 - 태권도 人]

위 내용은 국기원이 발행하는 <태권도피플> 5월호(지구촌 리포트)에도 게재 되었음을 알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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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오사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끼히로상이 이분의 반만 닮았더라도.....!

    2009/06/18 20:21
  2. BlogIcon 딸래미  수정/삭제  댓글쓰기

    우리 아빠 멋지다.. 진짜 멋져..언제봐도 멋지다 울 아빠는..

    아빠.. 남들은 부르조아 외국을 나갔다고 하지만..
    우리 아빠가 이런 일 하고 있다는거 이렇게 나와서
    너무나 행복해요.

    돈도 별루 받지도 못하고
    아빠가 뼈빠지게 일하시면서
    오빠랑 나 키워주신것도 너무나 감사드리고요..

    아빠..진심으로.. 너무나 감사하고 사랑해요..

    딸래미 올림..

    2009/10/21 01:23
    • BlogIcon 태마시스  수정/삭제

      안녕하세요. 아버님께 두 분 이야기를 많이 들어서인지 낯설지가 않네요. 님의 말씀대로 임 사범님은 정말 훌륭하신 분 입니다. 그간 개인적으로 많은 해외 한인사범님들을 뵈었지만, 진정 태권도 보급에만 혼신을 다하시는 사범님들은 찾기 힘들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임 사범님께 태권도 사범으로 갖춰야할 덕목과 정신을 많이 본 받고 있습니다. 부모님과 떨어져 생활하기 힘드실텐데, 늘 건강하시고, 행운 가득한 일이 많으시길 바랍니다. 한혜진.

      2009/10/21 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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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권도 전문기자 시절 여러 곳에 가고, 여러 사람들을 만났다. 가는 곳마다, 만나는 사람마다 느낌은 조금씩 달랐다. 그 중 기억에 남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오늘은 2007년 한 여름 대전에서 우연히 만난 한 태권도 가족을 소개할까 한다. -필자 주-

아빠는 '도장경영' 강의, 엄마는 1단, 아들, 딸 모두 4품

왼쪽부터 유재진(부), 임미현(모), 유슬기(딸), 유한결(아들), 오방균 관장(무궁화태권도장).

"아들과 딸, 그리고 아내가 태권도를 수련하면서 가정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

2007년 한 여름 대전에 출장을 갔다 지인의 소개로 태권도 매력에 흠뻑 빠진 유재진씨 가족을 만났다. 유재진씨 가족은 태권도를 통해 화목한 가정을 꾸리고 있었다. 아들과 딸 그리고 아내까지 모두 태권도를 수련한다. 가족의 주 대화는 '태권도'로 시작해 '태권도'로 끝날 정도라고 한다. 요즘은 가족 간에 대화도 없는 가정이 많다는데, 정말 화목한 가족이라 할만하다.

유재진씨 가족의 첫인상은 ‘건강’했다. 유 씨를 비롯해 아내와 자녀 모두 표정들이 밝았다. 건강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 사회적으로 아무 탈 없이 튼튼한 상태를 말한다. 다소 주관적인 판단일 수 있지만 짧은 만남에서 유씨 가족은 매우 '건강한 가족'이었다. 본래 기자를 만나면 꾸미기도 한다. 하지만 이날 만난 유씨 가족들은 너무도 꾸밈이 없었고 자연스러웠다.

아들 한결과 딸 슬기는 1999년 부모의 권유로 태권도장에 입관했다. 부모는 "당시 아이들이 또래 아이들에 비해 에너지가 넘쳐났다. 좋긴 하지만 그래도 에너지를 조금 낮추면서 인성교육까지 함께 할 수 있는 곳을 찾던 중에 태권도장 차량에 '예, 의, 도'란 문구를 보고 태권도장을 찾게 되었다"고 설명했다.

아버지 유재진씨는 자녀 건강의 기초는 '인성교육'과 함께 연결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유씨는 자녀들의 인성교육을 위해 태권도를 선택했다. 지금 두 자녀는 모두 태권도 4품. 자녀를 태권도장에 보낸 후 어머니 임미현(38)씨도 태권도를 배우기 시작해 지난 6월 4단에 승단했다.

유씨는 태권도를 수련하지 않지만 지역 태권도장 지도자들을 대상으로 도장경영과 관련한 세미나를 정기적으로 실시하고 있다. 가정에 새로운 변화를 가져다준 태권도에 무엇으로 보답할까 고민하던 중 자신이 배운 '경영 지식'을 지도자들에게 전하고 있는 것이다.

당시 유한킴벌리 인력개발부 교수(유아용품)로 재직하고 있는 유씨는 자신의 경험을 살려 침체되어가는 일선 태권도장들의 활성화에 기여하고 있었다. 유씨는 '성공 사례자'의 관점이 아닌 철저한 '고객입장'에서 신개념 역발상 도장경영 해법을 제시했다.

자녀 따라 태권도장에 간 엄마, 태권도 3급 지도자 도전에 나서

"친구 따라 강남 간다"라는 말이 있다. 아내 임미현 씨는 자녀 따라 태권도장에 갔다. 그것도 모자라 태권도 고단자가 됐다. 내친김에 그해 8월 국기원 연수원이 주관하는 '3급 사범지도자교육'에 참가할 계획이라고 했다. 아마 지금쯤이면 국기원이 인정한 정식 사범이 되었을 수 있겠다. 혹 태권도장을 개관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임미현 씨는 "아이들을 태권도장에 보낸 후 가끔 도장 행사에 참가함으로써 태권도가 가지고 있는 예의를 바탕으로 하는 호신술에 큰 매력을 느끼게 됐다"며 태권도를 직접 수련하게 된 동기를 설명했다.

가정주부로 평범하게 삶을 살아가던 임씨에게 '태권도 수련'은 새로운 도전이었다. 이는 무궁화태권도장 오방균 관장의 권유와 남편의 든든한 후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리고 임씨보다 먼저 태권도에 입문한 두 자녀의 응원도 큰 힘이 되었다.

태권도 수련을 시작하면서 임씨가 세운 목표는 1단 승단. 이 목표는 얼마 지나지 않아 깨졌다. "1단 승단심사에 합격하고 나면 모든 것을 다 이룰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1단을 승단하니 2단, 3단, 4단이라는 목표가 새롭게 정립되었다." 1년이 조금 넘는 수련기간 동안 임씨는 태권도의 매력에 흠뻑 빠진 것.

임미현씨는 태권도 수련을 통해 "자녀들과 함께 같은 운동을 함으로써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같은 목표를 향해 나아감으로써 자녀 교육 특히 예절교육에 많은 보탬이 되었다"며 "개인적으로는 무엇보다도 정신력이 강화되어 생활의 활력소를 얻어 30대 후반에 나타날 수 있는 정신적 공허함에서 쉽게 벗어 날 수 있었다"고 밝혔다.

이어 임씨는 "4단 승단 합격이라는 소식을 도장에서 알려 주었을 때 너무 기뻐 믿기지 않았다. 내가 태권도를 배우게 된 게 참으로 감사할 뿐이었다"며 "가정에서는 엄마와 아내로 생활하고 있지만 이제는 태권도 4단의 '태권도인'이라는 역할도 주어졌다. 내 인생에 태권도를 만난 것은 행운이다"고 강조했다.

"태권도 전문 지도자 될 거에요"
     -자녀 슬기, 한결 태권도 수련에 매진


당시 슬기는 태권도 시합에 출전했다가 손목이 골절되는 부상을 입고 있었다. 병원에서 8주 동안 각별하게 주의를 당부했다. 하지만 태권도를 계속하고 싶었던 슬기는 어느 때와 마찬가지로 태권도를 계속 수련하고 있었다. 결국 상태가 악화돼 부상부위에 핀을 박는 수술을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초등학교 입학 전부터 태권도를 시작한 한결이와 슬기는 앞으로 태권도 지도자가 되는 게 꿈이다. 한결이는 국가대표 시범단원이 슬기는 외국인들에게 태권도를 알리는 국제 태권도 사범이 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한결이는 태권도 시범단 활동에 열성이다. 슬기는 우리나라 대표 문화인 태권도를 외국인들에게 쉽게 설명하고 지도할 수 있도록 태권도와 함께 어학공부에 매진하고 있다. 이에 대해 유씨 부부는 "아이들이 원한다면 반대할 생각은 없다"고 말했다.

오방균 관장(무궁화태권도장)은 "욕심 같아서 한결이와 슬기 모두 태권도 선수로 키우고 싶다. 하지만 두 아이 모두 학업성적이 우수해 엘리트보다는 생활체육으로 태권도 전문 지도자가 될 수 있도록 도움을 줄 생각"이라고 말했다.

한결이와 슬기는 태권도뿐만 아니라 다른 운동에도 소질을 나타내고 있다. 달리기를 잘해 초등학교 때 전국소년체전 대전시대표로 출전한 바도 있다. 또 쇼트트랙과 스키 등 겨울철 스포츠에도 뛰어난 실력을 자랑하고 있다.

아버지 유씨는 "몇 년 전에 도장사람들과 강릉에서 포항까지 하이킹을 할 때가 있었다. 그 위험하고 힘든 길을 가족들이 3박 4일 동안 포기하지 않고 해낼 때 놀랐다. 이게 바로 태권도 수련을 통해 얻은 '도전정신'과 '극기'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태권도에 매료된 이 건강한 유씨네 가족을 인터뷰하는 내내 가족들의 '태권도 자랑'은 도무지 끝이 날 줄 몰랐다. 태권도를 통해 건강한 화목을 이어나가고 있는 유재진씨 가족의 '태권도 사랑'이 앞으로도 계속 이어지길 기대한다. 또한 이들 가족처럼 태권도에 참여하는 가정이 늘어났으면 한다.

[by 한혜진의 태권도 세상이야기 - 태권도 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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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창기 도장 운영에 관한 이야기가 시작되자 그는 흥분했다. 인터뷰 내내 흥분을 감추지 않았다. 힘겨운 미국 정착시절과 도장을 개관하기에 이르기까지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서 말이다. 흑인 빈민가에서 시작한 태권도장 운영은 쉽지 않았다. 어느 정도 예견은 했었다.

가장 큰 문제는 태권도에 대한 인지도와 관심 부족이었다. 당시만 해도 미국인들 대부분은 ‘태권도’란 무술 자체를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 ‘가라테(공수도)’라고 하면 고개를 끄덕일 정도로 알고 있었다. 가라테는 태권도보다 훨씬 앞서 미국과 유럽 등지에 보급이 되었다.

[정우진 회장이 1973년 아이오아주 씨더래피즈에서 처음으로 개관한 정스태권도장의 전경이다.]

그는 “도장 문을 연지 얼마 되지 않아 여러 사람들이 도장에 들어왔다. 반가운 마음에 달려 나갔는데, 오늘의 점심 스페셜은 무엇이냐고 하더라. 내가 무슨 말은 하느냐고 반문했더니, 그들은 중국음식점이 아니냐고 했다”면서 초창기 태권도장에 관한 해프닝을 들려주었다.

정우진 회장은 결심했다. 도장을 살리기 위해서였다. 울며 겨자 먹기로 간판에 ‘가라테’라는 말을 같이 사용하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제자들 앞에서까지 태권도와 가라테가 혼동되도록 할 수는 없었다. 비록 가라테의 명칭을 빌려 관원을 모집했지만 태권도의 정신을 알리고자 했다. 그래서 “태권도는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는 힘이 있으며, 자신에 대한 정신적인 도전이다”고 강조했다.

정우진 회장의 초창기 도장운영은 말 그대로 ‘태권도장’이 아니었다. ‘코리안 스타일 가라테 도장’이었다. 실제 80년대 만 해도 외국에서 태권도에 대한 인지도는 매우 낮았다. 지금도 유럽과 중동 등에서는 태권도가 가라테에 비해 보급률이 적은 편이다. 정 회장을 비롯한 당시 해외 곳곳에 태권도를 보급한 한인 사범들이 있어 지금의 태권도가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 회장은 가라테가 아닌 태권도를 미국에 알리기 위해 매일같이 미국인들을 상대로 이마로 벽돌을 격파하고, 발차기를 보여주며 태권도를 알렸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태권도를 배우기 위해 도장에 방문자가 점차 늘어났다. 

정우진 회장 사무실 벽면에는 정스태권도장의 역사가 한 곳에 정리되어 있다.

또 하나. 미국이라고 텃세가 없는 게 아니다. 우리나라도 타 지역에 가면 텃세가 있다. 미국인들 없겠는가. 흑인들로부터 작은 키의 동양인이 ‘희한한 무술’을 한다는 소문이 주변 동네까지 일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부터 정 회장은 동네 깡패들에게 표적이 되어 있었다. 당시만 해도 폭력과 범죄가 난무하는 흑인 빈민가였던 까닭에 도장개관 1년여 동안은 그들과의 힘겨루기가 반복되었다.

그가 가장 아끼는 도복과 띠. 낡았지만 태권도의 혼이 느껴진다.

이러한 과정은 정 회장 뿐만 아니라 초창기 태권도를 전파하기 위해 해외에 진출한 한인사범들이라면 모두가 겪었던 고충 중 하나다. 그래서 지금 태권도 인들은 초창기 해외 파견 한인사범들의 노고를 잊어서는 안 된다. 그들의 노고가 있었기 때문에 태권도가 세계화 될 수 있었고, 올림픽에 정식종목에 채택될 수 있었다.


무도로서의 태권도가 미국인들을 바꿨다. 태권도라는 이름조차 들어본 적이 없는 미국인들을 대상으로 시작한 태권도장.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정 회장은 앞날에 대해 확신이 서지 않았다고 뒤늦게 털어놓았다. 그래도 확실한 믿음이 있었다. 바로 태권도가 고유한 무도로서의 정신적인 가치가 높다고 생각했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결국 미국인들을 바꾸기 시작했고, 오늘날 태권도가 미국에서 타 무술에 비해 가장 높은 인기를 갖게 한 이유일지도 모른다. 그는 “도장의 문을 열고 첫 제자를 맞이한 순간부터 태권도의 정신적인 면과 무도적인 측면을 누누이 강조하고 실천했다”고 말했다. 

태권도 가치를 깨닫는 미국인들이 늘어나면서 그의 도장은 자연스럽게 정신적인 수련장으로 변해갔다. 동시에 수련생도 급격하게 늘어났다. 그의 제자들 중에는 비교적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몸과 마음이 다 망가진 소외 계층도 많았다. 또 신체적으로 건강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선천적 후천적 장애를 가진 사람들도 많았다. 그러나 그에게는 남녀노소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그들은 태권도를 통해 인연의 끈을 맺은 소중한 제자들이었다.

제자를 안고 있는 정우진 회장

이런 제자들을 보며 그는 “무도 태권도를 통해 자신이 갖고 있던 문제점을 훌훌 털어버리는 여러 제자들을 보면서 나는 오히려 그들에게 참으로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내가 무도인의 한 사람이라는 사실이 너무도 감사했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국내외 여러 태권도인들을 만나 보았다. 그 중 정우진 회장은 그 누구보다 태권도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었다. 눈을 뜨는 순간부터 잠에 들 때까지 오직 태권도 생각 뿐이다. 그래서 많은 태권도인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태권도를 통해 얻은 것은 다시 태권도에 환원하겠다던 그다. 이를 위해 그는 소외된 곳을 찾아 뜻을 같이 하는 태권도사범들과 자선 사업을  전개하고 있다.

2009/05/22 - [한혜진의 태권도 세상/태권도人 무술人] - [태권도人] 태권도로 아메리칸 드림을 이룬 작은거인 정우진 (상)


* 본 내용 중에 일부는 무술전문미디어 무카스미디어(www.mookas.com)에 게재 되었음을 알립니다.

정우진 회장은? 1943년 경상북도 울주군 청량면 개곡리에서 출생, 한양공대 기계과를 졸업하고 1971년 미국 이민. 아이오와 주 시더래프즈에 정착해 현재까지 거주하면서 한평생 태권도를 위해 몸을 바치고 있다. 1년 동안의 주유소 펌프맨 생활을 거쳐 1973년 흑인 빈민가에 처음으로 태권도장을 열었으며, 97년에는 뉴 라이프 피트니스 월드를 설립하여 동양인 이민자로서는 이례적으로 헬스클럽 사업에 진출하였다. 이후 미국 중남부전역으로 사업을 확장, 현재 8개 클럽에 2만여명의 회원을 확보하고 있다. 2002년부터 본격적으로 중국에 진출, 베이징에 설립되는 첫 헬스컬럽을 비롯하여 중국 내에 총 12개 클럽 오픈을 계획하고 있다. 이 밖에 Mountain Top Co.을 통해 백화점 및 오피스 빌딩 임대사업에도 참여하고 있다. 특히 태권도의 해외 보급하업에 관심을 기울여, 세계 120개국에 영문 태권도 잡지인 ‘태권도타임즈’의 회장을 맡고 있으며, 미국 콜로라도 주에 태권도연구소를 설립하였다.

저서로서는 1998년 ‘Free Style Sparring와 2002년 ‘세계가 우리를 기다린다’ 등 2편이 있다.

[By 한혜진의 태권도 세상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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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주짖수  수정/삭제  댓글쓰기

    원래 태권도는 가라데에서 나온것을 다 아는사실 아닌가요 ?

    2009/05/30 21:08
    • 태권브이  수정/삭제

      "원래 한국 불고기가 일본 야끼니꾸에서 나온 거 다 아는 사실 아닌가요?"와 같이 어처구니 없는 말씀이군요.

      설마 불고기가 일제시대에 일본에 건너가 오늘날의 야끼니꾸가 된 것도 모르시는 건 아니겠죠.

      일본인들은 카라데가 중국에서 오키나와로 건너온 중국 무술이라고 주장합니다만, 신라시대의 무술과 태껸, 수박치기 등 한국 고대무술이 현대의 카라데의 원형이 되었다는 것이 정설입니다.

      불고기가 일본에 건너가 야끼니꾸가 된 것처럼 말이죠.

      이것은 한국적 국수주의나 민족주의적 자존심과는 상관없이 그냥 있는 사실일 뿐입니다.

      잘못된 상식을 사실인 것처럼 말씀하시면 안되겠기에 말씀드립니다.

      2009/05/31 01:19
  2. ...........  수정/삭제  댓글쓰기

    원래 태권도가 가라데에 파생된 무술인데 무슨 코리안 스타일 가라데가 되었던 사연이란 겁니까.. 나참 황당해서..
    신동아에서도 다 까발라진건데...
    어찌 되었든 태권도는 가라데에서 파생된 무술입니다.
    그 근거로 태권도 초기 사범들이 전부 가라데 사범이라는 거...
    그리고 가라데는 중국에서 건너온거 맞습니다. 중국의 남권이던가.. 중국 남쪽 지역의 무술의 영향을 받아 오키나와에서 발전된 거지요.

    2009/05/31 01:45
  3. 말도안됨  수정/삭제  댓글쓰기

    수박치기라는 원형이 있기나 한가..마구 갖다부치지 마시져..
    택견이랑 태권도가 전래되어서 그렇다고? 택견을 한번이라도 해보고 그런소리하십니까?
    그냥 인정할껀 하고 앞으로 태권도의 역사를 써야지 본류가 어디인들 뭔 상관인가..태권도가 우리 고유무술이라는 건 집어져야한다.
    환상을 개야 발전이 있을뿐이다..

    2009/05/31 01:54
  4. ....  수정/삭제  댓글쓰기

    태권도가 일제 시대 가라데를 했던 분들이 해방 후 이름을 바꾸고 뭔가 약간 수정해서 비롯되었다는 것은 모두가 다 아는 주지의 사실입니다. 그분들은 순수한 무도인들이었다는 것을 믿고 싶습니다. 그 이후에 위 글의 주인공과 같은 수많은 사범들이 해외로 진출하여 태권도를 알리고 동시에 한국을 알린 공적은 높이 평가되어야 마땅합니다.

    2009/05/31 08:54
  5. 태권도뿌리는..  수정/삭제  댓글쓰기

    태권브이 미친놈.. 난 70년초에 청도관에서 팔괘형으로 태권도를 배우기시작했지만 성인반선배들은 철기,내보진등 가라데품세를 했어.. 청도관 만든 노병직님이 일본에 가라데를 전파한, 후나고시선생에게 직접 배웠다구.. 후나고시의 송도관가라데가 한국 태권도의 뿌리야, 한국에 토착화되고 몇십년의 시간이 흘렀으니 전통무술이라고 해도되는 것이지

    2009/06/01 17:22
  6. 태권도뿌리는..  수정/삭제  댓글쓰기

    후나고시기찐이 오끼나와(유구)사람이고 일본에 정착시키려 온 과정에서 한국인이 배워온 것이니 일본이 아닌 오끼나와에서 직접 배운 것이나 다름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오키나와에 데(手)라는 전통무술이 있었지만 낱기술위주였고, 오키나와를 방문한 중국사신의 일행중 공산군이란 사람이 품세를 가르쳐줌으로서 가라데(唐手)가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가라데 최초의 품세가 "공산군"입니다. 이 품세는 중국북파무술에 해당됩니다. 그후 오키나와사람들이 복건성에 들어가 중국남권을 배우고 와서 가라데의 범위를 넓혔습니다.복건성의 대표무술 백학권의 품세 '삼전'은 가라데의 대표적인 품세이기도 합니다.

    2009/06/01 17:35
  7. 태권도뿌리는..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게 진실이니 데(手)의 원형이 조선무술이라는 주장이 생겼습니다. 조선초에 오키나와와 교류를 했다는 기록이 있고 홍길동이 세웠다는 율도국이 오키나와 남쪽의 저항세력으로 상당기간 존속했다는 것도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홍가라(洪家王)세력은 극히 일부였기 때문에 귀족들의 압제를 받는 민초들을 부축여 민란을 만들어냈다고 합니다.그러기위해 철저히 오키나와민중들과 하나가 되기위해 언어,복식등을 받아들였구요. 축성이나 민간풍습에 조선식은 남아있지만 무술이 있었다는 흔적은 없습니다.

    2009/06/01 17:46
  8. 행인  수정/삭제  댓글쓰기

    태권도의 역사적 진실을 규명해야할 논의가 계속되어야 한다. 태권도학과 교수와 학생들도 뿌리를 찾기 위한 탐구가 계속되야 한다. 내일 내일 할때가 아니다. 지금 당장 시작해야 5년 후에 올바른 역사가 정립될 것이라 믿는다.

    2009/06/02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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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베이징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 때다. 최연호가 결승전을 승리로 마치면서 세 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세계선수권 개인 통산 3회 우승을 자축하는 세리모니였던 것이다. 고교시절부터 성인무대를 넘나들며 종주국 핀급 왕좌를 지켜오다 2005년 국가대표 선발에 좌절하면서 한동안 슬럼프를 겪기도 한 최연호(한국가스공사, 28). 군에 입대(상무)해 슬럼프에서 벗어나 이뤄낸 큰 성과인 만큼 기쁨도 두 배 였다.

[제18회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우승이 확정된 순간 세 손가락을 높게 들어 자축하는 최연호]

8킬로그램의 체중감량으로 눈이 쏙 들어간 최연호는 당시 필자와 인터뷰에서 “욕심일 수 있지만 다음 대회도 출전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 말은 공수표가 아니었다. 현실로 이뤄졌기 때문이다. 며칠 전 전북 김제에서 열린 태권도 국가대표 최종전에서 오는 10월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열릴 ‘제19회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 핀급(-54KG) 출전권을 획득했다. 개인 통산 4회 우승이라는 대기록에 도전하게 되었다. 우승시에는 한국체대 정국현 교수와 미국의 스티븐 로페즈의 4회 우승의 대기록에 타이를 이루게 된다.

[지난해 아시아선수권대회 결승을 앞두고 무릎에 심한 부상을 입어 결국 경기를 포기했다. 사진에 얼굴 표정에 심한 고통이 느껴진다. 결국 이 부상으로 무릎 수술을 하고 재활치료을 했다.]


이번 국가대표 선발이 더욱 값지다. 지난해 아시아선수권대회에 출전하여 큰 무릎 부상을 입고 수술을 한 후 장기간 재활치료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대로 은퇴를 했을 수도 있다. 주변에서도 은퇴해도 충분하다며 위로까지 건넬정도였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굳은 의지로 재활치료를 했다. 그 덕에 태극마크를 획득하면서 당당히 재기에 성공을 했다. 

태권도 선수의 경기력 생명은 매우 짧은 편이다. 경량급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개인 투기 종목인 만큼 부상도 잦고, 체중 조절을 해야 하다 보니 철저한 자기관리와 노력이 요구된다. 그런 점에서 최연호는 매우 훌륭한 선수다. 실력 보다 자기 관리가 철저하기 때문에 선수들 사이에서 충분히 모범 교과서로 통할만 하다.

최연호의 특기는 빠른 발차기와 노련한 경기운영이다. 득점력 또한 매우 정확하다. 우수실력을 갖춘 동료 선수들도 최연호의 발차기는 “빛과 같다”고 표현한다. 그만큼 빠르다는 것이다. 필자 역시 태권도 선수 출신으로 초등학교 때부터 수없이 많은 경기를 치렀지만, 최연호 만큼 발차기가 빠른 선수를 경험하지 못했다. 후배지만 늘 그의 빠른 발차기가 탐이 났다. 그래서 기자 시절 최연호를 '날쌘돌이'라는 수식어를 만들었다.

그보다 최연호가 빛나는 이유는 따른 곳에 있다. 수많은 경쟁자들 속에서도 꾸준히 정상을 지켜왔기 때문이다. 남들처럼 중간에 슬럼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2005년 실업팀 입단 이듬해 팀 선배 김진희에게 대표 자격을 빼앗긴 후 줄곧 기를 펴지 못했다. 고교 후배에게까지 패하면서 자신의 명성에 금이 가기도 했다. 그 때 슬럼프를 겪지 않았더라면 오는 10월 그는 태권도 사상 첫 ‘세계선수권 5연패’에 도전했을 것이다.

최연호와 함께 이번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주목해야 할 선수가 또 한명 있다. 남자 미들급 국가대표에 선발된 정영한(제주도청, 28)이다. 최연호와 함께 2004년 한국가스공사에 같이 입단한 동기다. 첫해 국가대표에 선발되어 제16회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 나란히 금메달을 따냈다. 이후 두 선수 모두 슬럼프가 시작된다.

[제16회 아시아선수권대회에 결승전을 뛰고 있는 정영한 선수]

정영한은 중요한 길목에서 번번이 실패를 맛본다. 은퇴를 고심하던 중 지난 해 국가대표에 선발되었다. 그러면서 은퇴를 잠시 미루기로 결정했다. 올해는 소속팀을 제주도청으로 옮겼다. 다른 선수들처럼 운동에만 전념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특히 정영한은 현재 국민대에서 박사과정 중이다. 학업과 선수 생활을 겸하고 있다. 공부와 운동을 동시에 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이런 와중에 국가대표에 선발된 것이다. 동료 선수들 사이에 귀감이 될 정도다.

선발전이 끝나고 나서 필자와 전화통화에서 그는 “이번이 정말 마지막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랬더니 좋은 결과로 이어진 것 같네요”라며 “훈련 열심히 해서 저도 세계대회에서 금메달 한 번 따봐야 겠습니다”라고 우승에 대한 포부를 밝혔다.

두 선수는 우리나라 나이로 내년에 서른이다. 태권도 현역 선수로 활약하기에는 적지 않은 나이다. 그런데도 좋은 성적을 거둔 것은 단순히 운이 좋아서가 아니다. 앞서 설명했듯 철저한 자기관리와 노력이 밑거름이 되어서다. 두 선수의 건투를 빈다.

[by 한혜진의 태권도 세상 이야기 - 태권도人 무술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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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전정신으로 아메리칸 드림을 이룬 ‘작은 거인’ 정우진
이민 결심에서,,,, 태권도를 통해 성공에 이르기까지의 이야기



미국 아이오와의 작은 도시 시더래피즈. 태권도를 통해 ‘아메리칸드림’을 이룬 한 중년의 남성이 살고 있다. 태권도타임즈 정우진 회장이 그 주인공이다. 오래 전부터 직접 만나보고 싶은 사람이었다. 그러다 2006년 미국 출장을 갔다 특별히 시간을 내어 그를 만나고 돌아왔다. 외국생활을 30년 넘게 한 사람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참~ 구수'했다.

“그를 만났다!”

미국 시카고에서 자가용을 타고 드넓은 평야에 널려있는 고속도로를 4시간가량 지났을 무렵, 아이오와주 시더래피즈에 그가 운영하는 정스태권도장에 도착했다. 그곳은 그가 미국에 정착해 두 번째로 건립한 도장이다.

정 회장은 스스로를 ‘키 작은 경상도 촌놈’이라고 소개했다. 단돈 35달러를 들고 무작정 미국으로 건너간 지 올해로 38년이 되었다. 문화와 풍습이 다른 나라에서 배고픔과 서러움, 무지막지한 고생 등을 이겨내며 그는 ‘아메리카 드림’을 이뤄냈다. 그리고 지금은 미국을 비롯해 여러 나라를 대상으로 태권도를 통한 국제사회 봉사활동을 왕성하게 전개하고 있다. 특히 북한 태권도 보급과 식량지원 등에 관심이 많아 우리나라에서는 '친북인사'로 낙인이 찍혀있는 상태다. 그의 국가관이나 정체성이 어떤지는 내게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아 모른다. 다만 내게 중요한 것은 그가 태권도를 그 누구보다 사랑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날 이후 그와는 종종 통화를 하고 지낸다.

미국을 선택한 이유는?

정우진 회장이 미국 이민을 선택한 이유는 다름 아닌 '새로운 도전'을 위해서다. 미국을 떠나기 전 콩나물장수를 시작으로 공장 노동일을 하며 대학을 다니면서 가정교사, 태권도사범, 보험영업, 타이어가게 운영, 택시사업 등 안 해본 일 없이 일이란 일은 다 해봤다. 그러나 늘 좋지만 못했다. 순조롭던 사업들이 연이어 실패로 끝이 났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또 다른 세상에 자신을 내던져 보자는 결심을 하게 된다. 그래서 전혀 다른 환경과 다른 인종들 속에서, 그가 살아왔던 전혀 다른 도전을 해보고자 다짐한다. 당시 남다른 기회가 보장되는 선망의 나라로 여겨졌던 미국이 그가 떠나야 하는 나라로 ‘찜’했다. 게다가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이민을 가서 남부럽지 않은 아메리칸드림을 이룬 경우도 많이 봤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국내와 달리 ‘돈’과 ‘빽’도 없이도 성실함과 도전정신만 있으면 성공할 수 있다고 전해든 정 회장의 마음은 이미 미국으로 떠났다. 

마침내 그는 1971년 12월 29일 김포공항을 통해 어렵게 발급받은 미국비자와 3년 분할상환으로 구입한 미국 비행기티켓, 그리고 단돈 35달러를 들고 새로운 세상과 인생 도전에 나섰다. 어렵게 미국행에 오른지라 그는 당시 부인과 배속에 있던 아이들 남겨두고 미국을 떠났다.

미국을 떠난 지 5개월 만에 자신을 닮은 아들을 낳았다는 소식을 아내의 편지로 알게 됐다. 그러나 어려운 환경 속에 전화를 해보는 것은 사치라 생각했던 그는 아무리 굶어 죽는 한이 있어도 아내에게 수고했다는 목소리 정도는 들려줘야겠다고 생각에 고민 끝에 전화를 걸었다. 아내는 아이의 목소리를 남편에게 들려주겠다며 잠자는 아이의 엉덩이를 때려가며 ‘애앵~’이라는 울음소리를 전해줬단다. 그는 아직도 그때가 가장 기억에 남고 가장 마음이 아팠다고 말했다.

[정우진 회장과 사무실에서 그가 아낀다는 유니콘 조각상을 배경으로 기념촬영]

흑인 빈민가 폐허에 태권도장 시작

정 회장은 미국으로 건너간 지 1년 9개월만인 1973년 9월 1일, 미국의 한 작은 마을, 그곳도 흑인빈민가에 태권도장을 열고 뿌리를 내렸다. 당시만 해도 미국 내에서는 블루스 리(이소룡)의 쿵푸가 대 인기였다(현재도 전 세계 어디를 가도 브르스의 리의 인기는 변함이 없다). 반면, 태권도는 미국인들에게 너무도 생소한 무술이었다. 당시 미국 내에 태권도장은 10곳 미만. 지금은 정확히 집계되지는 않지만, 태권도 도장만 약 1만5천개 이상, 종합태권도장은 약 3만개 이상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태권도장을 시작한 곳은 미국의 한 작은 도시인 아이오와주 시더래피즈 흑인 빈민가. 사실 도장이라고 해도 겉보기로는 창고 수준을 겨우 벗어날 정도인 30여 평의 작은 공간. 그러나 그에게는 자신의 몸과 마음에 가장 든든한 재산으로 자리 잡아왔던 태권도였기에, 그것도 먼 나라, 먼 땅에서 바로 태권도를 통한 새로운 도전의 공간이었던 까닭에 아직도 그때를 잊을 수 없다고 말했다. 

하편<“태권도? = 코리안 스타일 가라테”>에서 계속.

* 본 내용 중에 일부는 무술전문미디어 무카스미디어(www.mookas.com)에 게재 되었음을 알립니다.

정우진 회장은? 1943년 경상북도 울주군 청량면 개곡리에서 출생, 한양공대 기계과를 졸업하고 1971년 미국 이민. 아이오와 주 시더래프즈에 정착해 현재까지 거주하면서 한평생 태권도를 위해 몸을 바치고 있다. 1년 동안의 주유소 펌프맨 생활을 거쳐 1973년 흑인 빈민가에 처음으로 태권도장을 열었으며, 97년에는 뉴 라이프 피트니스 월드를 설립하여 동양인 이민자로서는 이례적으로 헬스클럽 사업에 진출하였다. 이후 미국 중남부전역으로 사업을 확장, 현재 8개 클럽에 2만여명의 회원을 확보하고 있다. 2002년부터 본격적으로 중국에 진출, 베이징에 설립되는 첫 헬스컬럽을 비롯하여 중국 내에 총 12개 클럽 오픈을 계획하고 있다. 이 밖에 Mountain Top Co.을 통해 백화점 및 오피스 빌딩 임대사업에도 참여하고 있다. 특히 태권도의 해외 보급하업에 관심을 기울여, 세계 120개국에 영문 태권도 잡지인 ‘태권도타임즈’의 회장을 맡고 있으며, 미국 콜로라도 주에 태권도연구소를 설립하였다.

저서로서는 1998년 ‘Free Style Sparring와 2002년 ‘세계가 우리를 기다린다’ 등 2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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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동영상 인터뷰] 35달러로 시작한 아메리칸 드림

    Tracked from 태권도와 마샬아츠의 오아시스 <태마시스>  삭제

    단돈 35달러를 들고 시작한 미국 이민사. 그가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기 까지 겪은 우여곡절들은 며칠 밤을 세워 들어도 모자랄거 같다. 태권도란 이름은 미국인에게 동양의 음식점 중 하나로 생각되었던 시기. 어쩔수 없이 태권도 옆에 적어 넣었던 가라데 간판. 당시 그는 자존심이 너무 상했다고 한다. 이를 악물었던 그 시기의 이야기를 영상에 담았다. 이 영상은 필자가 무카스미디어 재직시절 미국에 직접 방문해 취재한 자료로 본 블로그에 공유합니다. 영상에..

    2009/05/22 08:18
  2. 태권도로 아메리칸 드림을 이룬 작은거인 정우진 - 하

    Tracked from 태권도와 마샬아츠의 오아시스 <태마시스>  삭제

    그는 흥분했다. 힘겨운 미국 정착시절과 도장을 개관하기에 이르기까지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서 말이다. 흑인 빈민가에서 시작한 태권도장 운영은 쉽지 않았다. 어느 정도 예견은 했었다. 가장 큰 문제는 태권도에 대한 인지도와 관심 부족이었다. 당시만 해도 미국인들 대부분은 ‘태권도’란 무술 자체를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 ‘가라테(공수도)’라고 하면 고개를 끄덕일 정도로 알고 있었다. 가라테는 태권도보다 훨씬 앞서 미국과 유럽 등지에 보급이 되었다...

    2009/05/30 1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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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logIcon Bluepango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말 대단하신 분이군요.
    하편이 기대됩니다.

    2009/05/23 11:35
    • BlogIcon 태마시스  수정/삭제

      사실 별 내용이 없는뎅,,,기대를 하신다니,, 다시 신경써서 보충을 해야겠네요. ^^

      2009/05/24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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