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마을비리 전경환배경과 A씨의 유도원 관선체제

1988년 ‘새마을’비리가 연일 터지자 유도계는 긴장을 하게 된다. 5공 당시 새마을 비리의 주인공으로 부각된 전경환은 한국유도의 막후실력자로 군림하면서 유도회는 물론 유도원, 유도학교 등 유도계의 주요 현안에 관여해 왔다. 서울올림픽을 5개월여 앞두고 새마을비리가 불거지자 전 씨 체제 때 소외당했던 원로급 유도인사들은 유도회 집행부를 비롯한 유도원에도 불신을 갖기 시작했다.

전경환은 전두환 전 대통령의 동생으로 제5공화국이 들어서면서 막강한 힘을 발휘했다. 그는 1980년 9월 대한체육회 이사로 선임되면서 체육계와 직접적인 관계를 맺었다. 당시 체육계 일부에서는 전경환을 체육회 회장으로 추대하기 위한 사전포석이었으며, 한국체육행정을 좌지우지할만한 막강한 인물로 부상할 것이라는 추측이 많았다.

이런 전씨는 유도계에 직접 영향력을 미치기 보다는 당시 한국유도원 A 이사장을 통해 영향력을 행사했다. A씨는 유도학교 교장을 비롯해 관선체제에 있던 유도원에 5공 중기가 넘어선 1985년 2월 이사장까지 맡게 된다. 그는 당시 싯가 60억원이 넘었던 유도원을 내부분규를 틈타 관선 이사장직에 오르며 유도원을 접수한 것이다.

이후에도 각종 소송 등을 승소하며 그의 영향력은 지속됐다. 당시 A원장의 라인들은 유도회 행정에도 깊이 관여하기 시작했다. A원장은 유도회 실무 부회장으로 상당히 많은 권한을 가지고 있었으며 막대한 권력을 지니고 있었다. 1986년 1월 박용성 당시 OB사장을 회장으로 영입할 때도 영향력을 행사했다.

전씨는 새마을운동본부나 유도계를 통해 체육계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 과정에서 숱한 비리가 불거졌다. 당시 이 비리들은 전씨 보다는 주변 인물들이 그를 내세운 것들이 많았다고 한다.

당시 언론들은 전씨를 마치 핵심인물로 떠받치며 허영심을 만족시켜 주는 대신, 기금조성, 호화판 체육행사 등을 통해 얻어지는 단맛을 즐겼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전씨가 내세운 사회체육정책은 당시에 체육행정에서 소외된 부분을 극복하려는 긍정적인 평가도 받는다. 그러나 막강한 정치적 영향력을 바탕으로 체육기금조성을 위한 성금강요나 막대한 국고낭비 등은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유도회, 유도원통합 역제안 나서지만 실패

88서울올림픽이 끝나고 1989년 8월 유도원의 이사장에 송학준씨가 선임된다. 이 집행부를 계기로 유도원이 5년간 관선체제에서 민선이사로 집행부를 구성하고 정상적인 이사체제의 운영에 돌입하는듯 했다. 신임집행부는 유도원의 그림을 바꾸는 전략을 쓴다. 바로 재벌그룹에 의지해 오던 유도회의 재정을 자립시키겠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유도원이 건물임대료를 확보하는 방법으로 유도원 2층 건물을 헐고 그 자리에 20층에서 25층 사이의 건물을 짓는 것과 이 건물을 팔고 서울근교에 고층건물을 신축해 임대료를 유도회 운영자금으로 지원하겠다는 두가지 안을 제시한다. 결국은 부동산임대업을 통해 유도회의 자립을 지원하겠다는 의도였다.

하지만 이러한 유도원의 계획에 대해 유도회는 서서히 힘겨루기를 시도한다. 바로 유도원이 관선체제를 탈피하기는 했으나 5공 관선 이사가 포진된 것에 대해 고단자(6단이상)들의 불만이 크다는 점이 부각된 것이다. 그러나 유도원측은 이미 싯가 2백억원이 되어 버린 중앙도장을 쉽게 포기하지는 않을 태세로 맞섰다.

이런 분위기가 오고 가고 유도회측은 유도원과의 통합 법인을 통해 유도원 건물을 고층빌딩으로 신축, 임대료 등으로 재정자립을 하자고 제안한다. 이러한 제안에는 정부에서 대한체육회 산하단체들의 법인화를 시책에 힘을 얻으면서 유도회가 법인화될 수 있다는 근거로 설득력을 발휘한다.

1991년 1월 29일 유도회는 올림픽회관에서 정기대의원총회를 열고 유도원 흡수통합을 위한 특별위원회를 구성한다. 참석 대의원 22명은 임의단체인 대한유도회와 재단법인 한국유도원이 국내에서 별개의 단체로 알려져 있다는 점과 경기단체의 법인화시책을 내세운 정부의 입장을 반영한 것이라며 유도원을 압박한다. 이를 통해 유도회, 유도원, 중앙대의원 각 2명씩 6명과 유도고단자회 3명으로 구성된 9명을 특별위원회로 구성해 유도회와 유도원을 통합하기 위한 협의체를 구성하자는 제의를 한다.

1991년 2월 5일 유도회는 올림픽파크텔에서 9인 특별위원회를 열고 유도원 9명의 이사에 대해 자진사퇴를 권고키로 결의한다. 한국유도원에는 한명의 이사를 제외한 8명의 위원이 참석한 상태였다. 그러나 그 후 이 특위는 순탄한 길을 걷지 못한다.

1991년 7월 13일 특위는 유도회 이사로 4명의 유도원 이사를 영입하고 유도원도 유도회가 추천하는 4명의 유도인을 유도원 이사로 서로 교환하도록 결의하지만 통합의 실마리를 풀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결국은 유도회의 박용성 회장과 집행부가 사퇴하겠다는 배수진까지 치며 유도회와 유도원의 통합을 설득하지만 이 특위는 9개월만에 해체된다.

1991년 10월 22일 제5차 회의에서 끝내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이견만이 난무한 상태에서 더 이상의 회합이 필요없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9명의 위원중 5명이 참석한 이날 회의에서 유도원 이사장겸 유도회 부회장과 유도회 전무이사는 "양단체의 이사 4명을 교환 영입한다"는 특위 4차회의의 합의사항이 잘 지켜지지 않고 있는데에 대해 쌍방의 책임만을 물을뿐 해결의 실마리는 찾지 못하고 사실상 특위는 완전히 해체되었다.

(다음편에 계속)


2010/03/22 - [허건식의 무예보고서/무예보고서] - 파란만장한 유도중앙도장 이야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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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예보고서] 중앙도장 공백기 유도계갈등이 원인

중앙도장의 성격으로 가장 먼저 설립된 것은 유도중앙도장인 한국유도원이 있다. 국기원에 대한 수많은 논쟁이 오가고 있는 가운데, 유도의 경우 중앙도장은 어떤 모습으로 변했을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유도의 핵심시설로 일제시대에 설립돼 해방이후 유도단체들의 많은 갈등이 있었음에도 한국유도원은 지금도 존재하고 있다. 하지만 한국유도원의 기능과 역할에 대해서는 우리 무도계에 알려지지 않은 부분이 많다. 필자는 한국유도원에 대한 자료가 미흡하다는 사실을 알고, 당시의 신문과 각종 기록들을 토대로 정리해 보았다.

중앙도장 기공식장면(사진출처: 서울시청)


1972년 5월 18일 오후 2시.

여의도 벌판에 한국유도의 메카인 한국유도중앙도장 기공식이 거행됐다. 대지 2200여평, 지하1층과 지상2층으로 건편 668평. 당시 총공사비 7800여만원으로 1972년 11월 준공을 목표로 기공식을 가진 것이다. 이 당시 설립주체는 재단법인 한국유도원으로 당시는 대한유도회 지원단체였다. 기공식에 참가한 사람으로는 장경순 당시 대한유도회장, 양택식 서울시장, 신도환의원, 신동관의원, 그리고 유도인 200여명이 참가했다.

서울 소공동에 있던 중앙도장을 매각한 후 4년만이다. 그러나 이 기공식이후 예산부족으로 60%의 시설공사중 1년 반만에 공사가 중단됐다. 당시에 예산부족이라고 이야기했지만, 사실상 유도계의 파벌싸움으로 중단된 것이다. 중앙도장이 없던 이 시기에 대부분의 유도경기와 훈련은 YMCA, 연세대, 보성고 체육관 등을 전전하며 사용했다.

1975년 12월. 어려운 진통에도 불구하고 한국유도원은 완공을 하고 개관했다. 하지만 대한유도회와 한국유도원의 소유권과 관리권을 놓고 진통을 겪는다. 남들 같으면 서로 맡겠다던 시설을 당시에는 회관건립이 되었으니 무조건 인수하라는 유도원측(대표 장경순)과 1억이 넘는 은행기채와 숱한 문제를 안고 있는 운영문제 등의 독소조건을 해결하지 않는 한 인수를 못하겠다는 유도회(회장 신도환)의 서로 다른 입장 때문이었다.

이러한 문제는 소공동 중앙도장의 매각을 계기로 7년간의 분쟁을 일으킨 유도원과 유도회의 갈등에서 비롯된 것이다. 대한유도회는 이러한 갈등 때문에 대한체육회의 문제단체로 관리되는 최악의 상태까지 간 적이 있었다. 하지만 관리단체를 극복하고 난 뒤에도 유도원과 유도회의 중앙도장의 인수에 대한 갈등은 지속되었다.


소공동은 애경유지에 매각

유도원과 유도회의 갈등은 1968년 유도원이 소공동소재 중앙도장과 소유권과 관리권을 갖고 매각 처분하면서 시작됐다. 이 도장은 일제시대에 이씨 왕족의 대지를 빌어 일본강도관 조선지부로 설립한 것이다. 해방이 되자 소유권은 문화관리국으로 넘어갔고, 일본강도관출신이었던 신도환(1975당시유도회장)이 서류를 보관하고 있다가 1950년 9.28수복과 더불어 재단법인 대한연무관으로 넘겨준 것이다. 그 후 중앙도장은 연무관이 점유하게 되었다.

이러한 시기 유도계는 유도연맹과 유도협회로 양립되어 있었고, 5단 이상의 고단자들이 모여 일원화에 합의한 후 대한유도회로 통합된다. 이런 통합이 있었음에도 한국유도원은 1956년 발족하여 유도계를 군립했다. 하지만 이 일이 있기전 1953년 6월에 중앙도장을 본거지로 대한유도학교(현, 용인대학교)가 설립돼 중앙도장은 대한유도회, 한국유도원, 대한유도학교가 점유하는 복잡한 구조를 가지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복잡한 구조에서도 한국유도원의 이사장에 한진희씨가 추대되어 원활한 정비가 되는듯 했다. 1967년 1월 유도원의 3대회장에 장경순씨가 이사장으로 취임되면서 같은해 11월 이사회에서 재선처리에 대한 일체의 권안을 위임받는다. 당시에는 이 도장이 문화재관리국의 소유인만큼 임대료 미불 등의 행정소송까지 이루어진다. 1968년 대지 372평과 목조 217평의 소공동 소재 중앙도장을 공개입찰 끝에 애경유지에 평당 27만5천원에 매각처분된다.


도장은 완공되었으나 유도단체들 인수 기피


완공된 한국유도원의 모습

도장의 주인이 바뀌게 되자 함께 점유하고 있던 대한유도학교도 연고권을 주장하고 건물을 비워주지 않자 1969년 4월 명도소송으로 확대돼 대한유도학교측이 패소하는 일이 발생했다. 또, 이 시기 유도계에서는 중앙도장의 매도가격이 시가보다 절반 밖에 안된 가격으로 매각되었다는 소문이 나기 시작했고, 이것은 유도회 총회때마다 문제가 거론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유도원측은 중앙도장의 신축대지를 1970년 돈암동의 하천복개공사허가를 서울시에서 얻었으나, 건설부에서 허가가 취소되자 복개허가를 서울시에 반납한다는 조건으로 3천6백만원을 보조받게 되어 1971년 서울시에서 매립한 여의도의 유도회관대지 2410평을 당시 시가보다 낮은 평당 3만2천여원씩에 매입한다.

결국 유도원은 소공동 중앙도장을 매각한지 4년만인 1972년 11월 14일에 유도회관 건립에 착수됐고, 국고보조금 2천만원을 받으면서 자금난을 극복했다. 그러나 이 시기 은행기채 1억여원으로 겨우 완공시킨다. 당시만 하더라도 세계적인 유도전용도장이라는 시설로 모습을 탄생했다.

하지만 1964년이후 유도회장직에 있던 장경순씨가 1973년 유도회 정기총회에서 집행부 구성문제로 취임을 거부하자 본격적인 파벌싸움이 시작된다. 이 파벌싸움은 결국 유도원과 유도회의 이원조직화를 부채질하게 된다.

새 도장을 건립하고 유도회장을 당연직 유도원 이사로 정관을 개정한 유도원측 세력들은 유도회에 정식으로 회관의 소유권과 운영권을 인수할 것을 요청한다. 하지만 유도회는 은행기채액 1억원에 대한 금리만하더라도 매월 130여만원을 넘으며, 건물유지비도 감당하기 어렵다는 판단아래 유도회관의 인수를 거절한다.

이러한 거절에도 불구하고 당시 유도원측은 당시의 2천여평의 대지가 공지로 있는 만큼 땅값이 평당 10만원대까지 이르게 되면 이중 1천여평을 매각해 은행기채를 해결하고, 나머지 공지를 테니스장으로 만들어 수익사업을 할 수 있다는 입장을 보이기도 했다.

(다음에 계속)

* 이 글은 필자가 편집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무술전문지 <무카스>에 게재 되었음을 알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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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12.05 01:06 신고

'합기도'가 명칭논란에 휩싸였다. 그동안 합기도 학계에서 제기되었던 명칭사용에 대한 문제가 불거진 것이다.

국제아이키도연맹(IAF, International Aikido Federation)은 한국의 주무부처인 문화체육관광부와 스포츠대표단체인 대한체육회에 명칭사용에 대한 항의에 가까운 문서를 지난 5일 보냈다고 무예전문지 '무예신문' 2월 19일자에 보도되었다.

[##_'1C|cfile25.uf@1422B9274B8458BD2B39E9.jpg|width="450"_##]이 2월 19일자에 관련 뉴스를 보도했다.[사진=무예신문 캡처]'>

그 내용을 살펴보면, 경우 'Aikido', 한국의 경우 'Hapkido'로 불리고 있지만, 한자표기에 있어 '合氣道'로 동일하게 사용하고 있어 동일종목이라는 점을 들었다. 이러한 항의문서는 안 국제사회에서 별 탈없이 사용되던 용어에 대해 제동이 걸린 것은 최근 대한체육회에서 합기도단체를 인증한데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특히 IAF의 경우 GAISF회원단체로 국제경기단체로 인정받고 있는 실정이어서 국내 스포츠를 대표하는 대한체육회 가맹에 있어 한국의 아이키도협회가 배제된 상황에서 한국의 합기도단체가 가맹될 경우 혼선이 있을 수 있다는데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하지만 이에 대해 합기도단체들은 한국의 합기도는 일본의 아이키도와는 다른 수련체계로 별개의 무술이라는 주장을 하고 있다. 이러한 논리에는 일본 아이키도의 정립과정에서 일본과 한국이 각기 다른 기술체계로 정립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명칭논란에 있어서는 이미 유도가 'Yudo'에서 'Judo'로 영문표기를 바꾼 1980년대 초 부터 시작됐다. 한국의 유도를 주장하던 대한유도회가 국제스포츠로서의 유도를 인정해 영문을 수정한 것이다. 또, 검도가 1990년대에'Kumdo'가 아닌 'Kendo'로 수정해야 한다는 주장이 일기도 했다.
 
이러한 명칭표기의 논란은 국제용어의 표준화에 따른 것이다. 하지만 논란이 있음에도 검도는 아직도 'Kumdo'를 고수하고 있고, 합기도단체들 역시 'Hapkido'라는 명칭으로 사용되고 있다.


일부에서는 지적재산권에 대한 논란이라고 설명하고 있지만, 한 무술명칭에 대한 혼선을 막기 위한 단체들의 약속을 더 강조하고 있는 것이 국제스포츠계의 관례를 중시하고 있다. 지적재산권에 대한 논쟁보다는 국제사회에서 '짝퉁'으로 소외될 수 밖에 없는 문제와 자칫 정통종목에 대한 활동침해에 대한 윤리적 문제로 까지 번질 수 있다.

이러한 문제때문에 유럽이나 미주지역에서는 한국가에서 무술을 수용하고 변용해 새로운 틀을 구성하면 해당국가의 명칭을 앞에 붙히거나, 창시자의 이름을 앞에 붙히는 경우를 자주 볼 수 있다. '불가리안 켐포'라든지 '브라질리안 주짓수'가 대표적인 사례다.

이런 이유에서 한국합기도의 경우도'Korean Hapkido'라는 국제용어를 사용하자는 제안도 많았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이러한 노력은 묻히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근본적인 이유에는 한국의 합기도가 세계화 하는 과정에서 '표준화'작업이 미흡했고, 소홀한데 있었다. 이것은 합기도단체들의 시스템 부재가 원인이 된다.


일단 IAF측은 명칭사용에 대해 포문을 열었다. 이를 계기로 국내 합기도계에서 명칭논란은 다시 이슈가 될 것으로 보인다. 

무예신문 관련기사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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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www.usaprays.us/ BlogIcon fake hublot  수정/삭제  댓글쓰기

    대해 포문을 열었다. 이를 계기로 국내 합기도계에서

    2014.06.03 15:35 신고

일제 통치하에 우리나라에는 다양한 스포츠종목이 유입 되었다. 선교사들에 의해 서구스포츠가 유입되었으며, 일본인들에 의해 학교체육 및 일본무도의 유입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지금 체육사나 무술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당시의 자료를 국내에서 접할 수 있는 것은 당시의 신문기사나 일부연구자들의 연구물을 참고하는 수준에서 정리되고 있다.

필자는 얼마전 일제당시 조선총독부나 민간인들에 의해 시설을 갖추고 있던 무도도장 현황에 대해 1934년에 일본문부성에서 보고된 자료를 발견했다. 당시 일본인들은 검도 도장뿐만이 아니라, 유도, 궁도, 스모 등 일본 무도와 더불어 육상, 정구, 야구, 축구 등을 할 수 있는 시설까지 모두 조사되어 있었다. 그 내용중 검도, 유도를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이 보고서의 내용을 기준으로 우리나라의 6개지역 - 경기도(경성포함), 충청남북도, 전라남북도, 강원도, 평안남북도, 함경남북도 -을 구분해 설비명칭, 소재지, 개설년도, 면적(평), 용도, 관리자로 구분하여 정리하였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 표와 같다.

[경기도]

설비명칭

소재지

개설년도

면적(평)

용도

관리자

 경성무덕관

경성부 황금정

 1912. 7.

  120

 검도

陳丿內廘

 강도관

경성부 장곡천정

 1917.11

  120

 유도

篠田治作

 인천무덕관

인천부 산수정

 1922.10

   54

 검도, 유도

仁川府尹

 송도광무관

개성부 만월정

 1925. 8

   -

 유도,역기,체조

김홍식

 개성상무관

개성부 대화정

 1927.11

   73

 검도,유도

개성경찰서장

 평택무도관

진위군 

 1931. 7.

   12

 유도

박상만

 이천체육회운동장

안성군

 1931.11.

   32

 유도

분상동


[충청남북도]

설비명칭

소재지

개설년도

면적(평)

용도

관리자

 연무장

 연기군

 1921. 6

  52

검도, 유도

조치원경찰서장

 예산상무회연무장

예산군

 1929.10

  36

검도,유도,총검도

예산경찰서장

 보은공회당

보은군

 1927. 4

  144

검도, 유도

內田定吾

 음성연무장

음성군

 1927. 5

  30

검도, 유도

음성경찰서

 청주강무장

청주군

 1929.10

24

유도

濱田淸太郞

 제천연무장

제천군

 1931. 6.

30

검도, 유도

제천경찰서

 충주연무장

충주읍

 1931.10

40 

검도, 유도

충주경찰서


[전라남북도]

설비명칭

소재지

개설년도

면적(평)

용도

관리자

 연무장

제주도경찰서 

 1923. 2.

  29

 검도, 유도

제주도경찰서

 연무장

광양군

 1924.12

  22

 검도, 유도

광양경찰서

 목포상무관

목포부 대화정

 1926.10

  60

 검도, 유도

목포상무회장

 여수홍무관

여수읍

 1927. 6.

  30

 검도, 유도

古川安一郞

 완도연무장

완도읍

 1927. 6.

  99

 검도, 유도

전남상무회장

 임실군연무장

임실군 

 1929. 5.

  12

 검도, 유도

임실경찰서

 금산연무장

진안군

 1929. 6.

  58

 검도, 유도

금산경찰서


[경상남북도]

설비명칭

소재지

개설년도

면적(평)

용도

관리자

 부산경찰서연무장

부산부 영정 

 1924. 5.

  37

 검도, 유도

부산경찰서

 경남경찰관무도장

부산부 부민정

 1925. 5.

  65

 검도, 유도

경상남도

 부산상무관

부산부 부평정

 1927. 9.

  17

 유도

山下亦一

 무덕관

부산부 초장정

 1931.10.

  104

 검도, 유도

渡辺豊日子

 마산청년회검도장

마산부 본정

 1932.10.

  50

 검도

마산청년단

 철도국국우회무도장

부산부 초양정

  119

 검도, 유도

철도국국우회 부산지부

 경북무덕전

대구부 동운정

 1923.10.

  575

 검도,유도,궁도

재단법인 경북무덕회


[황해도]

설비명칭

소재지

개설년도

면적(평)

용도

관리자

 유,검도장

兼二浦邑

 1918

  36

 검도, 유도

荻野友助

 김천구락부

김천군

 1924. 6

  49

 검도, 유도

김천경찰서

 무덕관

사리원읍

 1928. 8.

  20

 검도

사리원경찰서

 무덕관

사리원읍

 1928. 8.

  17

 유도

사리원경찰서


[평안남북도]

설비명칭

소재지

개설년도

면적(평)

용도

관리자

 평양장무회

평양부 상유리

 1924. 4.

  40

 유도

평양장무회

 양무관

평양부 천정

 1929

  15

 유도

神野辰雄

 검도 및 유도장

추을미읍

 1930.12

  39

 검도, 유도

평양광업부


[함경남북도]

설비명칭

소재지

개설년도

면적(평)

용도

관리자

 신흥경찰서 연무장

신흥군

 1923.11

  23

 검도, 유도

신흥경찰서

 함남헌병대도장

헌병대내

 1924. 5.

  18

 검도, 유도

함흥헌병대장

 함남무덕반

운흥리

 1927.11

 818

 검도, 유도

함남경우회

 조선실소회사무도장

함주군

 1929

 230

 검도,유도,궁도

실소회사오락부


검도는 전국 각지에서 실시되었으며, 일본통치기 스포츠단체의 성격을 띤 단체로는 경성무덕회가 1912년 7월 경성부 황금정(서울의 황금동)에 설치되면서 검도를 보급하였고, 경기회 및 강연회 개최가 이루어졌다.

전남 목포상무회(1926)가 검도를 비롯한 유도를 장려하는 목적으로 설립되었고, 흥남구락부(1927)의 경우는 검도를 비롯해 각종 스포츠종목을 장려할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또한 인천체육협회(1925), 경기도체육협회(1926)을 비롯 각 지역의 체육협회에서 검도경기를 개최하기도 했다.
 
중요한 것은 각지역의 협회에서 특정종목을 육성하는 특성도 나타나는데, 경성의 강도관 조선지부(1917)와 함안체육회(1931)의 경우는 유도를 주요사업종목으로 협회를 운영하였다.

이외에도 일본문부성에 보관중에 자료에 특색있는 것은 일본의 궁도가 우리나라에서 조직적으로 활동한 점이다. 전국각지에 궁도를 장려할 목적으로 구락부가 형성되었는데, 경기도의 경우는 인천무덕정, 충청도의 경우는 군수가 대표자로 설립한 각종 체육협회에서 궁도를 장려했으며, 경상도의 경우는 대구체육협회가 궁도장려에 큰 역할을 했다.

또한 전라도의 경우는 영암궁도회(1925), 진도궁도회(1929), 제주궁도회(1931) 등에서 궁도장려의 독립적 조직을 갖고 있었고, 강원도의 경우는 철원체육회가 중점적으로 장려했으며, 황해도와 평안도의 경우는 각지역의 군수가 대표성을 체육협회를 운영하여 그 운영내용에 궁도를 다루고 있다.

이외에도 함경도의 경우는 원산체육협회(1925), 함흥체육회(1926), 흥남구락부(1927) 등에서 궁도를 장려하는 정책을 시행되었다는 것이 흥미롭게 대두 되었다.


[by 허건식의 무예보고서]

[태권도와 마샬아츠의 오아시스 - 태마시스 ㅣ www.taema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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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killerich.iptime.org BlogIcon killerich  수정/삭제  댓글쓰기

    처음 보는 정보네요^^..일제시대에 들어온거군요..
    흠.. 테마시스님~ 즐거운 하루 보내세요^^

    2010.01.13 07:04 신고
  2. Favicon of http://www.iplsa.org/online.html BlogIcon replica shoes  수정/삭제  댓글쓰기

    사실이 새삼 화제가 되고 있다. 한 때 태권도 지도자였던 아버지 밑에서 태권도를 배운 경험이 있다는 정도로 알려진 바 있었다.

    2014.04.18 12:54 신고

태권도와 타무도와 대결. 무신 격투대회.

무술에 관심이 좀 있다 싶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생각해보았을 질문으로 '세상에서 가장 강한 무술이 무엇이냐'는 것이 있다.

그렇다. 세상에서 가장 강한 무술이 무엇일까? 과연 그런 것이 있기는 할까? 기존에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무술들 중에서 꼽는다면 어떤 무술이 가장 강할까?

태권도를 하는 사람들은 태권도가, 유도를 하는 사람들은 유도가, 복싱을 하는 사람들은 복싱이 가장 강하다고 말들을 한다. 물론 누구의 말도 그대로 믿어줄 수는 없다. 그렇다면 붙어보면 될 것 아닌가? 그래서 생긴 것이 바로 현대 종합격투기의 원조이자 메이저리그인 UFC(Ultimate Fighting Championship)다. 1993년 미국에서 시작됐다.

UFC의 등장은 가히 '무술사의 혁명'이라고 부를 만 하다. 이제 꿈은 현실이 되었다. '내가 이기네, 네가 이기네'하고 말로만 떠들던 무술들이 8각의 철망 안으로 들어왔다. 유도, 가라테, 레슬링, 무에타이 등 각 무술들의 내로라하는 고수들이 자신은 물론이고 자신이 수련해온 무술의 명예를 걸고 승부를 겨뤘다. 초창기의 UFC는 현재와 같은 종합(綜合)격투기가 아닌 이종(異種)격투기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어떤 면에서는 이 때가 더 재미있었는지 모른다.

어쨌건 대회가 이어질 수록 승부가 가려졌다. 최강의 무술이 등장한 것이다. 그런데 '주짓수(柔術)'란다. 주짓수? 주짓수가 뭔가? 이때만 해도 무술전문가들에게 조차 생소했던 주짓수를 기반으로 한 호이스 그레이시(브라질)라는 선수가 유도, 레슬링, 가라테, 무에타이의 고수들을 판판이 꺾어 버리니, 세상에 놀래도 이만 저만 놀랠 일이 아니었다. 그 이후, 주짓수는 전세계적인 붐을 일으켰고 현대 종합격투기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무술로 여전히 인정받고 있다.

UFC70 가브리엘 곤자가 vs 미르

현재의 UFC는 이미 이종격투기가 아닌 종합격투기가 되어, 하나의 무술만 가지고 경기에 출전하는 선수는 찾아볼 수가 없다.

최소한 두세 가지의 주특기를 가지고 있어야 비로소 대회에 나올 만 하다고 하겠다. 내가 잘 하지는 못해도 당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다른 무술을 배우는 것은 상식이 되었다.

이종격투기가 점차 종합격투기로 발전하면서, 최강의 무술로 잠시 군림했던 주짓수는 권좌에서 물러났다. 여전히 영향력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말이다.

이제 종합격투기의 팬들은 '가장 강한 무술이 무엇이냐'는 것 보다는 '가장 강한 자가 누구인가'라는 것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므로 종합격투기의 시대가 되어버린 지금, 하나의 무술만을 강조하는 것은 시대에 뒤떨어졌다고도 볼 수 있다.

물론 자신의 근본이 된 무술을 강조하며 그 무술의 아이콘처럼 자리잡은 선수도 있기는 하다. 추성훈(유도)이 그렇고, 현 UFC 라이트 헤비급 챔피언 료토 마치다(가라테)가 그렇고, 세계 최강이라고 불리는 예멜리야넨코 표도르(삼보)도 이 범주에 포함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표도르가 최강의 선수라고 인정받는다고 해서, 삼보가 최강의 무술로 평가받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해둘 필요가 있다. 삼보가 훌륭한 무술이긴 하지만,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는 것은 왜 삼보는 강한가가 아니라, 왜 표도르는 강한가이다. 절권도를 수련한다고 해서 누구나 이소룡처럼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이제 다들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 최강의 무술을 꼽는다면, 어떤 순서가 될까? 종합격투기에서의 성적을 참고로 해서 말한다면, 주짓수, 무에타이, 레슬링 정도의 순서가 아닐까? 물론 순전히 개인적인 견해임을 전제로 해서 하는 말이다.

그렇다면 생각을 한번 뒤집어 보자. 세상에서 가장 강한 무술이 아니라, 가장 약한 무술을 꼽는다면 어떨까? 

전 세계의 수 많은 무술들을 강하다는 기준을 놓고 일렬로 세울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흔히 '저 무술은 무술로서의 가치가 없다' 거나, '짜고 치는 것'이라거나 '형태에만 치우쳐 무술보다는 무용에 가깝다'는 혹평을 듣는 무술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는 것이 중국무술 중에서는 태극권(太極拳), 일본무술 중에서는 아이키도(合氣道)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유감스럽지만 한국의 국기라는 태권도도 약하다는 평을 받는 무술 중 하나다.

우선 태극권은 무술이라기보다는 체조에 가깝다는 평을 받는 경우가 많다. 중국 정부에서 정책적으로 보급한 간화24식 태극권을 보면, 그런 평가도 무리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격투의 상황을 전제로 상대를 제압하거나 호신을 목적으로 한다기 보다는 건강의 차원에서 남녀노소 누구나가 쉽게 할 수 있는 형태를 띄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태극권도 종류가 많아서 곡선적이고 부드러운 양식태극권이 있는 반면에 직선적이고 강해보이는 진식태극권도 있다.

게다가 태극권의 고수가 보여줄 수 있다는 발경(發勁)은 그야말로 무술의 최고봉이 다다를 수 있는 경지라고 말해지기도 한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종합격투기의 역사에서 태극권을 주력 무술로 출전한 선수는 전무하며 앞으로도 기대하기는 어렵다. 흔히 하는 말로, 싸움이나 격투를 잘하기 위해 태극권을 배우는 사람은 찾기 어렵다는 것이다.

아이키도에 대한 평가도 비슷하다. 아이키도의 경우에도 유파에 따라 차이를 보이기도 하지만, 일반인들에게 보여지는 아이키도는 두 사람이 손을 잡고 마치 춤을 추는 것 같기도 하고, 공격과 방어가 시연되더라도 미리 짜놓은 각본에 따라 넘어가주는 것처럼 보이는 경우가 많다. 게다가 아이키도는 한국의 합기도처럼 주먹이나 발차기 등의 타격기술을 수련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도무지 실전에서는 '먹힐 것' 같지 않아 보인다.

2007년 소림사에 방문했을 당시 소림무술의 진수를 엿볼 수 있었다.


태극권의 발경처럼 아이키도에서는 '합기'라는 신비한 기술을 이야기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 합기라는 것을 실제로 경험해봤다고 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고, 또 합기를 할 수 있다고 선전했다가 실전 대련에서 망신을 당한 경우도 실제로 있었다. 합기를 한다는 것은 장풍을 날린다는 것처럼 허황되게 들리는 것이 사실이다.

태권도의 경우에도 다른 무술들과의 대결에서 적어도 공식적인 대회에서만큼은 성적이 저조하다. 성적으로 치면 낙제를 면치 못했다고나 할까? 그래서 현재의 태권도가 경기에 치중하다보니 일격필살의 정신은 사라지고 상대를 맞춰 점수따는 것에 급급하다는 비판은 어느 정도 상식처럼 받아들여지고 있기도 하다.

그러므로 가장 약한 무술을 꼽는다면, 태극권, 아이키도, 태권도 정도의 순서가 되지 않을까? 물론 이것도 개인적인 견해임을 전제로 해서 하는 것이다. 해당 무술을 열심히 수련하는 분들을 허탈하게 만들 의도는 없으니 오해는 없으시기 바란다.

21세기 현대에 무술을 수련한다는 것의 의미가 단지 '싸움을 잘하기 위해서'인 것은 아닐 터 이므로 취미로, 운동으로 한다면 남들의 평가는 중요한 것이 아닐 것이다. 물론 그래도 명색이 무술인데, 약하다는 평가를 받 으면 유쾌하지는 않겠지만.

그런데, 정말 태극권은, 아이키도는, 태권도는 약하기만 한 것일까?

[by 박성진 기자의 무림통신]

[태마시스 - 태권도와 마샬아츠의 오아시스 ㅣ www.taema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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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iconiron.tistory.com BlogIcon 레오  수정/삭제  댓글쓰기

    타격기만으로 이뤄진 무에타이가 제일 강하다는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만 ..

    2009.12.07 12:54 신고
  2. tlqnkld  수정/삭제  댓글쓰기

    스포츠에서의 성적만으로 그 무도의 강함,약함을 판단할수는 없다고 봅니다. 아무리 mma가 실전에 가장 가까운 룰이라고는 해도 실전과는 엄청나게 다르죠/

    2009.12.07 21:16 신고
    • 뭔 병?  수정/삭제

      당신 혹시 격투선수도 길거리에 나오면 스트릿파이터한테 깨질수도 있다는 환상을 하고계신건 아닌가요? 다분히 격투기까의 성향을 보이시는 리플이라.. -_- ㅋㅋ 실전에 가장 근접한룰이라면서 실전과는 엄청나게 다르다는건 대체 무슨말인가요.

      2011.01.23 12:33 신고
  3. 이런글 씁슬하죠.  수정/삭제  댓글쓰기

    무도는 스포츠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종격투기 종합격투기는 이미 무도가 아니죠. 무도의 진정한 의미는 육체단련을 통한 자기수련이지 누구에게 강함을 증명하기 위함도 누구를 이기기위함도 누구와 싸우기위함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궁금해야 할것은 과연 이종격투기 선수들이 정말 그무도의 진정한 고수들인가를 의심해 봐야합니다.
    무도의 진정한 고수들은 누군가와 겨루는것에 관심이 없기 때문에 강함을 과시하는것을 금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강함을 과시하고자 하는 사람을 수련이 덜된사람으로 치부하기도 하지요.
    스스로를 단련하는 무도가 어느새 남의 눈요깃거리나 되어 어떤 무술이 강한가라는 쓸데없는 생각에 휩쓸려야 하다니 씁슬하군요.. 남을 이기는 자가 강한게 아니라 자신을 이기는 자가 강한겁니다.
    이종격투기에 나오지 않는 진정한 고수 한사람이라도 만난다면 이런 것들 참부질없는 생각이구나 라고 생각할겁니다.

    2009.12.08 00:24 신고
    •  수정/삭제

      지랄을 하세요.

      2010.08.15 07:11 신고
    • ㅋㅋ  수정/삭제

      무도건 격투기건... 본질은 육체를 단련시켜 상대를 제압하는 거란다...-_-;

      자신을 이기고 수양을 할려면 가서 명상이나 해...-_-;

      참고로 이종격투기에 나오지 않는 진정한 고수 따위는 없으며...
      길거리에서 쌈 좀 합네.. 하는 놈들은 격투기 대회 예선에서 다 나가떨어진단다...

      ㅉㅉ

      2011.04.27 13:37 신고
  4. 흠..  수정/삭제  댓글쓰기

    단기간 태권도를 배워본 입장에서 말씀드리면 태권도 자체는 강한무술이라 생각합니다..단지 현재 너무 스포츠화 되고 경기에 치중하다보니 그렇게 된거라 봅니다...스포츠라고 해도 보통 사람보다는 또는 투기를 수련하지 않은 사람에 비해서는 어느정도 격투능력을 가졌다고 봅니다.태권도 품새를 보면 하나하나가 상대를 제압하기 위한 의미가 들어있고 요즘은 그 품새가 그저 형식적인 동작으로만 치부되는거 같기도 합니다. 결정적으로 보급에만 신경쓰니 무술로서 태권도의 면모는 퇴화 된거라 봅니다. 태권도가 진정으로 무술이라는것을 증명하기 위해선 여타 대회에서 강함을 입증하는것도 필요 합니다. 단지 개인 수련만 하면서 심신운운 하는건 선비노름일 뿐이라 생각합니다. 올림픽에서는 올림픽에 맞게...격투기 무대에서는 격투기 무대에 맞게 수련을해야 합당하다고 봅니다..꼭 태권도 뿐만 아니라 열거한 무술들도 마찬가지라 봅니다.

    2009.12.08 00:55 신고
  5. Ejql  수정/삭제  댓글쓰기

    무술이 강한것이 아니라. 강한것은 사람에 따라나오는 결과물이고. 무술은 그사람의 기본을 만들어주는것아닐까요?
    즉, 천재 한 사람이 태권도하면 태권도가 가장강하게 되고, 유도를하면 유도가최강, 유술하면 유술이 최강. 사람에 따라 달라지는게 맞겠죠?

    UFC도 종합격투기지만 사람이 강하면 그뿐 어떤 무술을 쓰냐는 논외일듯하네요.

    2009.12.08 09:16 신고
  6. 메롱  수정/삭제  댓글쓰기

    글쎄요...태권도 자체가 약하다는 말에도 설득력이 있는 듯 합니다. 예전에 월간잡지 신동아에 주먹으로 이름을 날렸던 조창조씨를 인터뷰한 기사가 나왔는데 거기서도 태권도 발차기는 화려하기만 했지 실전엔 쓰지 못한다라는 내용을 본 적이 있습니다. 태권도가 너무 경기화되면서 무술로써의 본질을 잃은 것은 사실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희망적인 것은, 실전적이라고 평가받는 극진가라데와 태권도를 비교해봐도 두 무술 사이에는 기술적인 차이가 별로 없다는 데 있습니다.

    이는 바꿔 말하면, 태권도 자체가 약한 무술이라기보다는 수련과정이 실전이 아닌 경기 위주로 촛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이란 말이죠.....만약에 태권도를 가지고 무에타이처럼 대련을 시키면서 훈련시킨다면 (얼굴펀치 ok, 팔꿈치도 ok, 다리공격도 ok 등등) 아마도 최소한 입식경기에서는 좋은 성적을 낼 것으로 예상합니다.....종합이야 타격기만으로 되는게 아니니 논외로 치고요...

    지금같이 얼굴에 펀치공격도 못하고, 둘이서 통통 뛰다가 발차기나 한두번 내지르는 식으로 훈련 및 대련을 해서는 더 실전적으로 수련하는 다른 무술에게 통할리가 없자요...

    2009.12.26 16:14 신고
  7. Favicon of http://www.van-insurance-cheap.co.uk/commercial-van-insurance/ BlogIcon Commercial Van Insurance  수정/삭제  댓글쓰기

    또 다른 좋은 기사 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디 다른 사람이 작성 등 완벽한 방법으로 그런 정 보를 얻을 수 있을까?

    2011.07.04 04:43 신고
  8. Favicon of http://www.bookwormlab.com/elementary-book-report BlogIcon elementary book report  수정/삭제  댓글쓰기

    내가 운동을 사랑 해요. 나 자신은 5 년 동안 타이어 권투에 대한 일을하고 있습니다. 저자와 그의 의견을 잘 알고 있으므로. 기사 주셔서 감사합니다

    2011.07.14 20:11 신고
  9. Favicon of http://www.insurance4motortrade.co.uk/ BlogIcon motor trade insurance online quote  수정/삭제  댓글쓰기

    제가 게시물을 작성의 방법을 찾아 드리겠습니다. 지금 당신은 쉽게 나를 이해하고 개념에 대한합니다. 이 리뷰가 주셔서 감사합니다! 매우 유익한 기사. 나와 함께이 아름다운 문서를 즐기는 줘서 고마워.

    2011.10.07 04:49 신고

2009/06/18 - [태마뱅크/백과사전] - 가노지고로(嘉納治五郞; 1860∼1939)의 생애와 근대유도의 발달 (1)
에 이어 계속.

유술의 시대에는 생명을 걸고 했던 격렬한 승부는, 창조된 안전한 경기 속에서 행하여지고 있으며 기술로부터 도에 들어가는 동양적인 무도관도 현재의 인식속에 살아있다.

술(術)은 기술(技術)을 의미한다. 따라서 술(術)에서 강조되는 것은 기술 그 자체이다. 술(術)을 행하는 가장 큰 목적은 싸우는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도(道)는 인간이 살아가는 삶의 길이다. 그리고 자신의 심신을 향상시키는 삶의 방법을 의미한다.

비록 유도와 유술의 기술이 닮아쓸지라도 유도의 수련과 훈련의 가장 큰 목적은 유술과 다른 것이라는 결론을 얻었다.

도(道)를 포함하고 있는 여러 단어들이 있다. 예를 들면 불도(佛道), 다도(茶道), 서도(書道) 등의 각각은 단순한 행위의 차원을 떠나서 자신의 인격함양의 의미를 갖고 있다. 가노의 유도는 승패를 떠나서 심신을 단련하는 데 목적을 둠으로써 승패만을 목적으로 하는 유술과 차별성을 갖게 되었다.

- 術에서 道로 전환은 평화와 건강의 원리를 뜻한다.

- 術은 사람을 상대하기 위한 기술로서 힘의 과시를 주제로한 폭력의 원리(공격적)이다.

- 道는 폭력을 부정하는 평화의 원리로서 순수한 방어논리(나를 지키는 수단)이다.


이러한 논리는 도(道)가 본체로, 술(術)은 부수(部隨)된 것으로 도에 들어가는 수단이 되었다. 술(術)로부터 지양(止揚)하여 인간생활 전반에 통하는 대도(大道)로 되었던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가노는 술(術)을 도(道)로 바꾸어 승부법으로서의 유도, 체육법(體育法)으로서의 유도, 수신법(修身法)으로서의 유도로 나누고 이것을 '유도의 세 부문'으로 이론화 하였다.

1882년 1월 가노는 당시 귀족들이 경영하던 학습원(學習院)의 강사가 되어 숙소를 시모다니영창사(下谷永昌寺)로 옮기고, 처음으로 가노주꾸(嘉納塾; 학원)을 설치하여 학생들을 가르쳤다. 5월에는 영창사(永昌寺)의 마당에 12장의 다다미를 깔아 도장을 만들고 이를 '고도깐(講道館)'이라 이름하였다. 

같은 해의 9월 영창사(永昌寺)에서 진다(神田)로 옮기고 1886년 98명, 1887년 292명, 1888년에는 378명, 1889년에는 605명으로 늘었으며 후지미(富士見)시대에는 1,400명으로 늘어나게 된다. 당시의 비용은 모두 가노가 부담하였다. 수련생들이 모두 귀족계급의 자산가들이었으므로 강도관(講道館)의 비용은 모두 여기에서 충당되었다.

이 후지미(富士見)시대에 강도관의 형태는 거의 체계화 된다. 입문자의 서약서, 원단식(元旦式), 홍백경기, 월례경기 등의 여러행사가 이 시대에 결정되었다. 기술적으로도 안정되어 현재에도 행해지고 있는 '메치기 본', '굳히기 본', '부드러운 본', '5가지 본' 등의 기본이 이 때에 성립되었다. 

가노는 여러가지 유술(柔術)의 기법(技法)을 이어받아 유도(柔道)라는 새로운 명칭을 붙였는데, 유술이라 하는 것이 실제로는 그 근본이 '도(道)'가 있고 '술(術)'이란 오히려 그 응용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 때문에 가르침에는 먼저 도(道)로 시작하여 그 위에 응용의 술(術)을 가르치는 것이 적당하다. 그러나 후꾸다(福田), 기(磯), 오꾸보(飯久保)의 3명에게는 쥬우쥬쯔(柔術)란 명칭으로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에 전연 다른 이름으로 명칭을 변경시키는 것도 그렇고 하여 '유(柔)'의 한 자만을 쓰기로 하여 유도(柔道)로 하였다. 

1882년 5월에 유도를 연구·지도하기 위하여 도장을 개설하였는데 명칭에 관해서는 어디까지나 도(道)를 중시하고, 도(道)를 넓히고 도(道)를 강의(講)하는 곳(館)이라 하여 '고도깐(講道館; Kodokan)'이라 명명하였다. 단순히 무술을 가르치는 장소가 아니라는 것을 확실히 하기 위함이었다. 만약 구태의연하게 무술의 도장이라 한다면 연무관(鍊武館), 상무관(尙武館)이라 해도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명칭을 피해 '강도관(講道館)'이라고 한 것은 "도(道)는 근본, 술(術)은 응용"이라는 사실을 명백히 하기 위해서라고 하였다.

유도는 과학적인 원리에 맞추어 공격과 방어의 방법을 가르치고 여기에 가미하여 신체의 합리적인 육성법을 가르쳤다. 그리하여 그 배경으로 단순한 무사의 마음 가짐뿐만 아니라 문무의 도를 가르쳤던 것이다. 이런 이유로 무술과 체육과 수심(修心)의 도(道)를 합한 것이 유도라고 말할 수 있다.

가노는 본(本)과 자유연습의 관계에 관해 "마차의 두 바퀴, 새의 두 날개와 같이 어느 한쪽에 치우쳐서는 안된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유도의 본(本)이란 마치 문장을 쓰는데에 있어 문법과 같은 것이다. 난도리(자유연습)는 작문의 연습이다. 아무리 문법에 정통하다고 해도 곧 바로 명문을 쓸수는 없다. 또 문법도 알지 못하고 엉터리로 문장을 쓸 수도 없다. 이것과 마찬가지로 유도에 있어서도 본을 배우지 않으면 공격 방어 여러면을 이해하고 익숙하여 질 수가 없다. 그러나 오로지 본만 수련한다면, 순서에 따라 일정한 틀로 연결은 되지만 만약 상대가 본에 없는 수법으로 공격해 오는 경우 그 응수에 곤난하여 패배하게 되기가 쉬울 것이다. 상대가 어떤 변화기술을 걸어 와도 이것에 대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난도리(자유연습)가 필요하며, 본과 난도리(자유연습)의 두가지를 함께 수련할 때 비로소 완전한 수련이 된다.

처음의 '메치기의 본'은 10가지였다. 이 본은 주로 사용되는 신체의 부위에 따라 손기술, 발기술, 허리기술, 바로 누우며 메치기기술, 모로 누우며 메치기기술로 분류하여 메치기 기술의 이치를 이해시키려 하였다. 이후 새로운 메치기, 굳치기 등의 기술체계가 발전하게 되었다.

현대 유도를 창시한 가노가 유도경기의 방법을 오직 일본의 여러 유술 유파의 장점에서만 따온 것은 아니다. 그는 1930년에 공인된 레슬링 규정을 참고하기도 하였다. 일본 강도관의 자료실에는 가노 지고로가 생전에 쓰던 메모를 전시하고 있다. 가노 지고로가 친필로 깨끗하게 정서한 내용은 '레슬링심판규정'이라는 제목하에 북미합중국 아마추어 레슬링규정(1930공인)에 관한 경기장 설비규정과 선수의 복장 등에 관한 것이다. 또 강도관 자료실의 전시자들도 유도가 레슬링규정을 참고하였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이로 미루어 보건데 현대의 유도는 경기장과 선수복장 등에서 레슬링의 제규정을 참고하였음을 알 수 있다.

유도는 더욱 발전하여 1911년에는 일본의 중학교에 "체조의 격검(검술), 유술은 부과할 수 있음(수의과)"이라 하여 정식과목으로 채택된다. 그리고 세계 제1차대전을 전후하여 일본 국민의 상무적 기풍으로 1914년 제1회 전국고등전문학교 유도대회가 개최되고, 1930년에는 제1회 전 일본유도 선사권(選士權)대회가 개최된다. 뿐만 아니라 가노는 해외의 유도보급을 위해 선수들을 이끌고 직접 한국, 중국, 유럽 등을 순방, 일본 유도를 세계에 소개하였다.

1941년 일본은 태평양전쟁을 일으키면서 유도도 군사적 실전을 위한 훈련으로 변질 규정된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폐전으로 인해 무도(武道)라는 용어가 사용금지 되는 등 대단한 박해를 받게 되지만, 경찰은 그래도 유도와 검도를 실시하여 그 전통을 이었으며, 학교 유도의 금지령해제를 원하는 소리가 높아지면서 1950년 학교유도가 부활되고, 1951년 6월에는 전 일본학생유도 연맹이 결성된다. 

1952년 일본은 국제유도연맹을 창립하고, 가노의 아들인 가노리세이(嘉納履正)가 회장에 취임한다. 1956년에는 동경에서 제1회 세계유도 선수권대회가 열리고, 1960년 로마올림픽대회 총회에서는 유도를 올림픽 선택종목으로 결정한다. 이제 유도는 일본의 유도가 아니라 인류 공통의 무도스포츠로 발전되었다.

by 허건식 체육학박사(1999년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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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의 글은 《유도론》의 저자 김상철교수님과 필자가 1999년 겨울방학을 이용해 '일본유도연구'라는 주제로 용인대학교 무도연구소에서 정리한 글이다. 이 당시만 해도 근대유도의 효시라 할 수 있는 강도관유도와 강도관유도의 창시자 가노지고로에 대한 소개가 국내에서 부족한 시기였다. 당시 정리한 내용을 좀 더 요약한 글이다.
글. 허건식(사단법인 대한무도학회 간사 / 현 서일대학 교수)

가노지고로는 1860년 10월 28일 가노지로사꾸마레시가의 3남으로 효고겡 무꼬군 미가게초 하마시가시에서 태어나 어렸을때의 이름은 신스께였다. 메이지 3년, 11살이었을 때 고향에서 동경으로 상경하여 가기가라초에서 부친과 함게 살게 되었다. 상경한 지고로는 가까운 요고꾸의 세이다쯔즈꾸에 다니게 되어 우부가타게이또라는 사람에게 학문을 배움과 동시에 간다의 미쯔꾸리 슈헤이라는 학당(쥬꾸)에서도 학문을 닦았다.

메이지6년, 14살때에는 이꾸에이 즈꾸(학당)에 들어가 처음으로 기숙사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 즈꾸는 네델란드사람이 선생이었고, 독일사람이 조교였으며, 모든 학과는 영어로서 진행되었다. 가노는 이전에 미즈꾸리 슈헤이의 즈꾸에 다닐 때 어느정도의 영어를 배웠기 때문에 학과에서는 별다른 어려움이 없었지만 당시에 그들사이에 강한 사람이 인정을 받는 풍조가 있었기 때문에 신체가 작았던 가노로서는 여러모로 불리하였다. 또한 병은 없었지만 매우 허약해 보이는 체구인탓에 항상 그들 사이에서는 약해 보였다. 

학문에서는 타인에게 지지않다는 자신감은 있었지만 몸이 허약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소외당한 것에 대해 항상 불만을 지니고 있어 자신을 강하게 하는 좋은 방법이 없을까하는 고민을 하였다. 때때로 어렸을 때 일본에는 유술이라는 것이 있어 약한자가 강한자를 이길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기억을 상기하여 유술을 배우고 싶어 했다. 그때 가노의 집에 자주 오던 자들중에 나까이 우메이나리라는 사람이 있어서 자신이 옛날에 유술을 배운적이 있다고 자랑하면서 여러 가지 가타(形)을 보여 주었기 때문에 그 사람에게 유술을 배우고 싶다고 부탁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이 당시에 유술을 배울 필요가 없다고 하면서 거절하였다. 

또한 고이시가와 마루야마초에 있던 부친의 별장에서 일하던 편동유사라고 하는 사람이 가끔씩 유술의 형을 보여 주었기 때문에 이 사람에게도 유술을 배우고 싶다고 부탁을 하였지만 거절당하였다. 그밖에 마찬가지로 자신의 집에 출입하던 비후출신으로 이마이겐시로라고 하는 사람이 큐신류라고 하는 유술을 배운 사람에게도 부탁하였지만, 그 역시 거절 당하였다. 이와같이 유술수련이 불가능한채로 학업에 열중하였지만, 보다 강하게 되고 싶다는 생각이 항상 머리속에 있었다.

메이지 7년 4월21일 동경외국어학교의 입학시험에 합격하였기 때문에 이구에이즈꾸에서 동경외국어대학의 영어학부에 전학하였고, 이 학교가 얼마 있지 않아 영어부가 독립하여 관립 영어학교로 되었다. 메이지 8년 개성학교에 입학하였다. 이 개성학교에는 육체적으로 강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지배하려는 풍조가 이꾸에이즈꾸에 있을때보다 더욱 강하였기 때문에 신체적으로 허약했던 가노는 더욱더 유술에 대한 욕구가 강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부친에게 유술가를 소개해 달라고 여러차례 부탁하였지만, 그 당시에는 공부가 우선이라고 하여 동의하여주지 않았다. 그러나 자신도 상당한 연령에 있었고, 신체를 강하게 하기위하여 유술을 배우는 것이기 때문에 자기자신에게 적당한 스승을 찾으려고 신중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

 명치10년 18살 때 동경대학이 창설되어 그 대학의 문학부 제2기생으로 입학하였지만, 입학당시 언뜻 정복술을 하는 사람이 유술가로서 유명하다고 들었기 때문에 그때부터는 정복이나 접골이라는 간판이 있으면 직접 들어가 유술을 한적이 있는지 없는지를 물어보며 찾아 다녔다. 그러나 유술에 대해서 잘 모른다는 사람이 많았고, 그 중에서는 과거에는 유술을 하였지만 당시에는 유술을 하지 않고 있다는 사람들이 더많았다. 이런식으로 스승을 찾아 헤매고 다니던 때에 니혼바시(日本橋)의 민교초 거리에서 벤케이바시에서 멀리않은 곳에 접골간판이 보였기 때문에 들어가 물어 본 결과, 야기마사스게라는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은 머리와 수염이 하얗고, 골격이 장대하고 실로 위풍당당한 대장부의 풍모를 지니고 있었다.

유술을 한 적이 있느냐고 물으니, 가만히 가노를 살펴본 뒤에 왜 그런 질문을 하느냐고 되물었다. 자기자신이 유술을 배우고 싶다는 처지를 설명하니, 가만히 듣고 있던 야기노인은 무릎을 치며 기뻐하였다. 그러나 자신은 이소마타우에이몬의 제자로서 그 면허를 받을 정도로 옛날에는 전문적으로 유술을 하였지만, 지금의 분위기는 유술에 대해 인정을 하지 않는 추세였기 때문에 접골한 하고 있다고 하였다. 왠만하면 가노의 희망을 들어 주고 싶지만, 이곳은 8장의 다다미공간으로 비좁고 게이코가 불가능하다고 하였다. 그러나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니혼바시의 모토다이꼬초에 자신의 동문인 후꾸다야스께라는 사람이 있다. 다른 친구들은 거의 대부분 유술을 그만 두었지만 이 후꾸다는 도장을 가지고 있으니 한번 가 보아라고 소개를 해주었다. 여기에서 후꾸다를 방문하니 여기서도 겨우 10장의 다다미공간밖에 없었고, 그 중에서도 다다미 한 장정도는 계단으로 사용되고 있어 나머지 9장이 도장으로서 사용되었고, 다음의 3장정도의 공간이 접골의 치료소가 되어 있어 6장밖에는 도장의 공간으로 활용할 수 밖에 없었다. 이 공간도 때로는 환자의 대기실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가노는 자신의 바라던 희망이 이루어져 크게 기뻐하며 드디어 텐진신요류의 유술을 접하게 되었다. 이때 후꾸다의 문인으로 게이코를 하러 온 관원들은 가끔씩 오는 사람이 4-5명정도였고 매일 오는 사람은 1명이었다. 격일로 오는 사람은 1명정도였다. 그중에서 매일 다니고 있던 사람은 선생으로부터 형을 배워 그 것을 관원들에게 게이코를 시키고 선생과 동료들과 자유연습을 하는 형태의 연습이 매일 계속되었다.

이때의 연습은 찰과상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온몸이 만진창이 되도록 연습하였던 시기였다. 이렇게 열심히 한 덕분으로 기량은 더욱더 늘게 되어 메이지 12년 미국의 전대통령(18대)인 글랜튼장군이 왔을 때 시부자와에이이찌 라는 사람에게 초대되어 이소 마사토모, 후꾸다 야스께와 그밖의 유술 명가와 함께 아스까야마에 있던 시부와자별장에서 유술시범을 보였다.

메이지12년 8월 14일 후꾸다 스승은 52세로 죽게 되었고, 후꾸다의 제자들중에는 난도리로서는 가노보다 강한 제자가 있었지만 형과 난도리를 병행해서 수행하였고, 매일 도장에 나온 제자는 가노뿐이 없었고 그 게이코 연습에 열심히 한 점을 고려해서 후꾸다 사람들로부터 신용을 받아 후꾸다가에 전해져 오는 전서 1절을 물려받게 되어 후꾸다의 도장을 위탁받았다. 여기서 한때 그 도장을 맡아 연습을 하였지만, 아직까지 혼자서 도장을 운영할 자신이 없었고, 더욱이 더 높은 수준의 수행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였다. 그레서 새롭게 인문한 것이 간다에서 도장을 열고 있던 텐진신요류(天神眞楊流)의 이소마타우에이몬의 내제자로서 이소가에 입적하여 3대째의 도장을 상속받고 있던 이소마사토모의 도장에 인문한다. 이소도장에서는 후꾸다도장의 동료 후꾸시마 겐요시와 함께 입문하게 된다.

당시에 마사토모는 이미 60세정도의 노령으로서 자신이 직접 난도리 지도를 하지 못하였지만 형의 명인으로 가타의 가르침은 자기자신이 직접하고 있었다. 난도리는 사또와 우라마쯔라고 하는 사람이 간사를 담당하고 있었지만, 가노와 후꾸시마도 후꾸다 도장에서 상당한 출현을 하고 있던 상황이였으므로 이 2사람도 입문과 동시에 간사에 취임하게 되어 앞의 2사람과 함께 보조사범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 도장에 매일 출석하는 사람은 30명정도 되었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휴식하는 사람이 많았다. 따라서 가노 혼자서 대부분의 사람을 상대로 매일 형을 수련하였다. 또한 난도리도 매일 30인을 상대로 수련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고, 형연습과 난도리의 연습으로 늦게까지는 11시가 넘어서 귀가하는 경우가 많았다. 어떤때는 연습과다로 인하여 길을 걸을때는 비틀비틀거리며 쓰러진 적도 있었다고 한다. 이 마사토모선생은 체격이 매우 작았고, 젊었을 때부터 난도리는 별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형에는 명인있지만 난도리에서는 강하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자신은 이소의 도장에서는 난도리는 거의 자신이 가르치면서 선생으로부터는 형에 대한 것은 매우 많이 배웠다고 술회하고 있다. 이와같이 열심히 수행하고 있을 때 이소는 명치 14년 6월 62세로 죽게되어 또다시 스승을 잃게 되었고, 다시 새로운 스승을 찾으려고 노력하였다. 세 번째의 스승은 기또류의 이이꾸보고넹이다. 이이꾸보는 가노의 대학친구 모토야마마사시사의 부친인 마사오의 소개로 알게 되었다.

모토야마는 법학부의 제1회 졸업생으로 명치 12년에 졸업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가노보다 선배였고, 학과도 틀렸지만, 가노가 대학에 입학한 때에 대학에서 야구가 시작되어 가노와 고다이류사꾸(오대용작)는 투수, 모토야마와 시오다라는 사람은 포수를 하였다. 그래서 모토야마와 매우 친하였고, 조정(漕艇)이나 소풍에도 항상 함께하는 절친한 관계였다. 

모토야마의 부친은 전 막부의 강무소에서 기또류 유술의 선생을 역임하였고, 상당한 기또류 유술의 명인이었기 때문에 가노는 전에 배운 텐진신요류와는 다른 유파여서 가르침을 구하였다. 이 사람은 가타의 명인으로 난도리는 그다지 훌륭하지는 않았지만, 당시에는 제자를 받아들이려고 하는 기분은 아니었다고 한다. 그러나 가노의 스승에 대한 가르침을 갈구하는 자세에 감동한 그는 자신이 선생으로 모시고 싶었던 유술의 명인을 소개하고 싶다고 하여 가노는 찾아 가게 되었다. 그가 바로 이이꾸보고넹이었다.

그 역시 강무소의 유술사범으로 가노는 처음으로 기또류를 접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텐진신요류와 기또류의 기술차이에 많이 놀랐다. 텐진신요류에서는 조르기와 관절기, 눌러굳치기 등이 주된 기술이었고, 던지기 , 메치는 어느정도 있었지만, 배되치기(도모에나게), 아시바라이, 허리기술(고시나게) 등은 기또류와는 기술사용방법이 많은 차이가 있었고, 기또류의 가타와 텐진신요류의 형은 서로 그 기술상 시각에서 차이가 있었다. 또한 이이꾸보고넹은 47세 연령이었지만, 난도리도 상당한 수준에 있었기 때문에 가노도 열심히 게이코를 하였고, 처음에는 가노도 이이꾸보에게는 절대적인 열세였다. 여기에 가노는 성심껏 새로운 연구에 몰두하여 신중하게 기술을 창출하였다. 이렇게 하여 유술수련에 열중할때도 학생으로서의 본분은 열심히 하여 명치 14년 7월 9월 정치과와 경제과를 동시에 공부하며 문학부를 졸업하였다. 당시의 제도에서는 문학부는 정치, 경제, 철학, 국문학의 4부분으로 나누어져 그 중에서 국문학은 독립하였지만, 그밖의 학과는 2개학과씩 전공할 수 있었고, 더욱이 정치, 경제, 철학의 3과는 3년간 공통전공으로 배울 수 있었다. 이외에도 1년 더 철학을 전공하였다. 

철학을 전공할 당시 명치 15년 1월에 학습원에 새롭게 연수과가 설치되어 1월 15일 강사로 위촉되어 정치학과 경제학과에서 강의하였다. 이외에도 가노는 유술이외에 야구, 체조, 배구, 조정 등 다양한 운동을 하였다. 그중에서도 유술에 매력을 지니고 매진하였다.

가노지고로는 18세때 텐진신요류(天神眞楊流)를 후꾸다(福田八之助)와 이소마사지(磯正智)에게 배웠으며 20세때에는 오꾸보(飯久保恒年)으로부터 기또류(起倒流)의 가르침을 받았다. 그리하여 두 유파의 교육적 가치가 대단히 큰 것임을 깨달았으며, 아울러 다른 유파에 관해서도 비교 연구하여 유술이 정신과 신체발달에 귀중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

모든 유파에는 그 나름대로 장·단점을 갖고 있음을 발견하여 이것을 어느정도 개량하면 무술로서 뿐만 아니라 체육으로서도 유익하며, 정신의 수양 혹은 처세법으로도 가치가 대단히 높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가노지고로는 배운 유술 가운데 텐진신요류(天神眞楊流)의 급소지르기와 굳히기, 기또류(起倒流)의 메치기 기술을 중심으로 타케우찌류(竹內流)의 체포술(捕縛), 세끼구찌류(關口流)의 낙법(落法) 등 다른 많은 유파를 비교 연구하여 실제로 연습을 실시함으로써 원리에 맞는 것은 취하고 맞지 않은 것은 버렸으며, 여기서 더 나아가 새로운 기술을 만들어 새로운 지도체계와 방법을 확립하였고, 자유연습과 본의 연습에 의해 체육의 목적을 이루고 승부의 방법도 일종의 지육(知育), 덕육(德育)도 될 수 있도록 고쳤다. 단순한 무술에서 도(道)로 지양(止揚)되어 여기에 유도라는 명칭이 나오게 되었다. 

유술을 유도로 개칭한 이유를 살펴보면 옛날부터 유술은 전쟁에서 우선 활의 위협으로부터 시작되어 나중에는 도검(刀劍)에 의한 싸움으로 이행되어 화살이 떨어지고 칼이 부러졌을 때 아무것도 없이 맨손으로 싸우는 무술이다. 유술은 상대를 넘어 뜨리는 기술 외에 상대를 찌르기도 하고 차기도 하는 급소지르기 기술, 상대의 손목과 팔꿈치를 꺾는 관절기술, 상대의 목을 졸라서 죽이는 조르기 기술 등 많은 기술을 갖춘 종합무술이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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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진 기자의 태권도와 타무도] 제9편 유도  
 
                         Sports News - February 15, 2009

유도(柔道)는 여러 가지 면에서 태권도가 배워야 할 점이 많은 무술이다.

태권도의 경우 올림픽 잔류 여부를 걱정하고 있지만, 유도가 올림픽 종목에서 퇴출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 태권도보다 36년이나 빠른 1964년에 이미 올림픽 정식종목으로 채택되었으며, 이후 동양을 대표하는 무술스포츠로서 전 세계에 확고한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국내에서도 유도에 대한 관심은 높다. 실례로 태권도 세계대회에서 우승한 국내 선수들에 대한 일반 미디어의 보도는 찾아보기 어렵지만 유도 세계대회에서 우승하는 등의 성적에 대해서는 빠지지 않고 다뤄지는 것을 볼 수 있다.  

태권도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로서 대중적인 스타로 자리잡은 사람으로는 문대성 정도를 꼽을 수 있지만, 유도의 경우에는 2008년 베이징올림픽에서 스타로 자리잡은 최민호, 왕기춘을 포함해 이원희, 추성훈 등이 CF모델로 활동할 만큼 대중적 인지도를 가지고 있다. 이 모두가 유도가 국제스포츠로서 확고한 위치에 있다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국제스포츠로서의 유도는 국제유도연맹(IJF)이 이끌고 있다. IJF의 위상도 확고하다. 박용성 현 대한체육회장이 IJF 회장을 지냈으며 현재도 일본인이 아닌 오스트리아의 마리우스 비제르 회장이 IJF를 이끌고 있다. 

유도는 국제스포츠로서의 위상도 확실하지만, 무도(武道)로서의 위상도 그에 못지않게 확고하다. 유도의 본산 고도칸(講道館)이 있기 때문이다. 태권도의 국기원이 바로 이 고도칸을 본보기로 해서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다. 

태권도의 기술발전 및 연구, 지도자 배출, 수련의 3가지가 주요 업무라고 할 수 있는 중앙도장으로서의 국기원이 현재 제 역할을 잘 해내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불만의 목소리가 많다. ‘단증 공장’이라는 오명까지 쓰고 있는 게 현실이다. 

고도칸에 있는 유도 창시자 가노 지고로의 동상.

그러나 고도칸의 경우, 이런 불만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내부적으로는 문제되는 부분들도 없지 않겠지만, 유도의 성지(聖地)로서 고도칸이 가지고 있는 위상에는 흔들림이 없다. 가장 큰 이유로는 유도의 창시자 가노 지고로(嘉納治五郞, 1860~1939)의 힘을 꼽을 수 있다.

잘 알려진 대로 유도는 사무라이들의 무술인 유술(柔術)을 모태로 해서 만들어졌다.
 
가노 지고로는 천신진양류(天神眞楊流), 기도류(起倒流) 등 몇 가지 주요 유술 유파들에서 위험하거나 비효율적이라고 생각되는 기술은 빼고,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기술들은 강조해 오늘날의 유도를 만들어냈다. 이렇게 과거의 ‘무술(武術)’을 ‘무도(武道)’의 경지로 끌어 올리고, 이를 가르치는 곳[講道]으로 강도관을 설립했다. 이후 ‘도’라는 이름이 들어간 무술들(태권도, 검도, 공수도, 합기도 등)은 모두 유도의 영향으로 만들어졌다고 볼 수 있다. 

가노 지고로는 ‘유도’를 만들어냈을 뿐만 아니라, 근대스포츠의 발전에도 지대한 공헌을 한 인물로 꼽힌다. 동경제국대학을 졸업한 가노는 1909년부터 30년간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으로 활동했으며, 근대 올림픽의 창시자 피에르 드 쿠베르텡의 가장 중요한 협조자가 되었다. 

이렇듯 근대 동양무술의 발전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이 바로 가노 지고로다. 지금도 강도관의 정문 입구에는 가노 지고로의 동상이 서 있다. 가노 지고로는 말하자면, 김운용과 최홍희가 한 역할을 혼자서 해낸 인물인 것이다. 그러면서 모든 유도인들의 존경을 받는 인물이다. 모든 태권도인들의 존경을 받는 인물은 누가 있을까?

[by 박성진의 무림통신 - 태권도와 타무도]

[태마시스 - 태권도와 마샬아츠의 오아시스 ㅣ www.taema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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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gamelog.kr BlogIcon 태현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말 태권도는 '스포츠'라는 의미에서 올림픽 종목에 맞게 룰을 뜯어 고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유도는 시간이 종료 될 때까지 '한 판'이라는 마지막 카드가 있기 때문에 끝까지 긴장을 놓칠 수 없듯이 말이죠.

    분명 태권도도 유도에 뒤지지 않는 우리의 자랑스러운 무술일텐데 올림픽종목에서 보이는 스포츠는 안타깝기만 합니다.

    2009.06.05 16:18 신고
  2. Favicon of http://blog.yahoo.co.kr/greatjobs30 BlogIcon Michael  수정/삭제  댓글쓰기

    대국적인 지혜가 필요합니다.
    스포츠 선수나 스포츠 외교를 펼쳐서 외교선양을 하는 사람이든지 과학이나 학술 분야, 그외 모든 분야에서 국위선양하는 사람에게 특혜는 못줄 망정 조금의 잘못이 있을 때 한번의 기회를 더 주는 것이 옳지 바보같이 그것을 빌미로 죽이면 다 무너집니다. 국익과 글로벌 위신을 생각하는 차원을 대국적으로 높여야 합니다.
    소국민의 마인드와 닭대가리의 지혜로는 결단코 세계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할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하고 각성하도록 합시다. 나라는 작지만 마인드가 대국적이면 가능성이 있습니다.

    2009.06.13 00:22 신고
  3. Favicon of http://ad.nikeairmaxukoutz.com/ BlogIcon nike air max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름다운 여자가 해바라기하는 걸 좋아해요

    2013.04.02 00:11 신고
  4. Favicon of http://da.bottesuggds.com BlogIcon ugg france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름다운 여자가 해바라기하는 걸 좋아해요

    2013.04.03 00:50 신고
  5. Favicon of http://dr.suprashoesel.com/ BlogIcon supras shoes  수정/삭제  댓글쓰기

    한세계를 놓고 말하면 당신은 한 사람이지만,단 한사람을 놓고 말하면 당신은 그라삼의 세계입니다.

    2013.04.03 22:51 신고
  6. Favicon of http://www.christianlouboutincanadaelle.com/ BlogIcon Louboutin Shoes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렇죠? ^.^ 귀여운 애들이 있어, 피로가 덜 쌓이는 듯 합니다.

    2013.05.08 17:45 신고
  7. Favicon of http://19027.jasonjordans.com/nikefree.php BlogIcon nike free run  수정/삭제  댓글쓰기

    사람들은 죽을걸 알면서도 살잖아 .사랑은 원래 유치한거에요

    2013.07.13 07:28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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